노재석 목사(전주 서부중앙교회)

 
교리 담지 못하는 말씀 위기가 목회 위기로 이어져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목적 둔 사람을 세워나가야
목사인 내가 문제 … 말씀 앞에 늘 정직해야 한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기본은 그 자체로 전부라는 의미다. 급변하는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이 강하게 자리한 지금, 기본을 자칫 초보나 입문의 개념으로 오해해 식상해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기본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특히 신학과 신앙, 교회에 있어 기본은 더더욱 중요하다. 기본이 변질되면 아무리 포장을 예쁘게 한다 해도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노재석 목사(전주 서부중앙교회)는 기본에 충실한 목회자다. 아니 기본이 강하다. 그의 메시지나 글을 접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진리에 타협이 없고, 성경에 반한 현상에는 가감이 없는 재단작업이 들어간다.

노재석 목사는 그리 알려진 목회자는 아니다. 그러나 전주에서는 현재 시쳇말로 ‘대세(大勢)’다. 하지만 대세 교회치고는 내로라할 만한 상징적 사역이나 프로그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우수한 시설을 갖춘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목회여정에는 성장과 부흥의 은혜가 있었다.

개혁교회 신학과 성경에 대한 확신과 통찰력, 여기에 시대 흐름 이해와 인문학적 깊은 소양이 남다르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허공을 치는 법이 없다.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의 풍성함에서 우러나는 확신과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한국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현란하고 세련된 색다른 방법이 필요할까? 아니면 개혁교회의 ‘오직’이자, ‘전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기본이 필요할까? 노재석 목사와의 짧지만, 묵직한 울림이 있는 인터뷰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 노재석 목사
▲이단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진안사랑의교회에 이어 지금의 전주 서부중앙교회 역시 분열로 어려울 때 부임해 양 교회에서 모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쉽지 않았을 일인데 그것도 두 번이나 어려운 교회를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진안사랑의교회는 이단시비로 7년간 분쟁을 겪은 후 개척을 한 교회였다. 진안사랑의교회 존재조차 몰랐다. 동료들과 진안에 있는 이랑공동체를 탐방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일행 중에 개척한 교회가 있으니 잠시 방문하자 해서 따라갔다. 그것이 진안사랑의교회를 부임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그 교회 장로님과의 만남에서 말씀에 대한 갈급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느껴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평소 중소도시에서 담임목회를 생각하던 중에 있었고, 친구들의 권유도 있어 진안에 가게 되었다.

사례는 다르지만 서부중앙교회 역시 내부 갈등으로 상당한 홍역을 치렀고, 분열도 발생한 교회였다. 이로 인해 수백 명에 이르던 교회가 2001년도에 첫 부임할 당시 39명이 남은 상황에서 시작했다.
교회를 옮김에 있어 교회 부흥이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목회에 있어 부흥이 초점이 아니라 좋은 교회 만드는 것이 비전이라고 성도들과 공유했다. 숫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많은 교회 가운데 좋은 교회 즉, 복음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재석 목사는 밝히지 않았지만 진안에서도 기적 같은 부흥을 경험했고, 현재 전주 서부중앙교회에서도 1000명이 넘는 교세를 갖고 있을 정도로 성장한 상황이다.)

▲분열된 교회를 담임하며 목회자로서 어떤 면이 가장 힘들었나.

=진안은 7년을 싸워 상처의 골이 깊었다.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나 좋지 않은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사랑과 은혜, 치유를 많이 생각했다. 진안과는 달리 전주의 경우 상처가 깊지 않았다.

진안에서 목회하며 나 스스로가 많이 변했다. 언어도 그렇고, 생각과 행동도 구수해졌고, 둥글해졌다. 사실 이전의 나의 성격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관계적이고, 따뜻하고, 서민다움으로 변했다. 그러한 변화로 지금의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안과 전주에서 큰 은혜를 경험한 것 같다.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 대한 생각이 많았을 것 같다.

=교회 형편과 상관없이 애초부터 교회론 즉, 개신교 교회관은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사람’이다.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모임이 중점이 아니라 사람들 그 자체이다. 건물은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사람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목회와는 다르다. 행사나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와 설교에서 항상 교회를 강조한다. 사람을 강조하니 인격과 성품이 성숙하고, 치유도 일어나고, 무엇보다 복음에 꼼짝할 수 없는 매임을 느낀다고 성도들은 말한다.
 
▲너나 할 것 없이 한국 교회가 위기라 한다. 무엇이 위기라 생각하는가.

=두 가지다. 하나는 ‘말씀의 위기’이다. 설교가 본문 중심적이 않고 개혁주의적인 해석이 없다.
설교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고픈 말을 전달한다.

설교 이야기를 할 때 동료 목사들에게 강해설교를 권면한다. 그러면 싱겁다는 반응이 먼저 온다. (강해설교를) 못해서 싱겁지 성도들은 주제설교가 오히려 식상하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경우 주제설교를 3년 정도하면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그래서 주제설교가 오히려 더 식상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다른 반응은 강해설교를 하면 시의 적절하게 교회와 상황에 맞는 필요를 강조하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에 큰 잘못이 있다. 설교는 목사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목사의 필요에 의해 목적을 갖고 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필요에 의해 써 먹는 것은 분명 잘못됐다. 그러면 말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만 기억하게 된다.

또 다른 위기를 말하자면 ‘삶의 이중성’에서 비롯된 위기이다.
이것은 말씀의 위기와도 직결된다. 말씀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라 한다. 말씀에 대한 갈급한 영혼이 많다. 의외로 많다. 회개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삶으로서 함께 아파하고 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반은 외형적이고, 삶이 없다.

우리 교회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흔한 전도집회도 안한다. 이벤트라 말하는 행사도 없고, 심지어 연합사역도 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인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근본적인 질문이다. 신학교육의 문제라 생각한다. (이 부분(신학교)에서 그는 조심스러운 이야기라 망설여진다고 했다. 하지만 실상이 그러하기에 잘 풀어서 정리해달라고 했다.)

일례로 총신을 졸업하면 다들 성경을 배우지 못하고, 어떻게 설교할지 모른다고 한다. 교인 양육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졸업을 한다고 한다. 신학의 부재다. 이러한 신학의 부재는 결국 목회의 위기, 교회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교리는 성경정신인데, 그럼에도 설교에 교리를 넣지 못한다. 교리에 대한 맥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에 녹아내지 못한다. 말씀과 교리, 목양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다. 물론 개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도 있지만, 신학의 문제가 비중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 노재석 목사는 ‘본질 회복’을 추구하는 목회로 기본에 충실한 사역을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 영향도 있을텐데.

=안티 기독교도 결국 교회 내부적인 문제다. 흔히 ‘공공신학’, ‘광장신학’ 이야기를 하는데 기독교인이 사회적으로 무례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많은 부분에서 기독교인들이 예의와 기본상식을 실종했다. 사람은 착한데 신앙관이 잘못돼서 그런 것이다. 이것이 외부적으로 비쳐져 반감을 더 사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교회 내부에 대한 충성 일변도로 가기 때문에 성경에서 가르치는 세상에서의 삶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신학과 생활예배를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성도들을 교회에 잡아두고, 가두려는 일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술, 담배 끊는 것이 신앙의 개념이나 척도가 되는 것을 넘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가 고착화되어서 세상과 더욱 단절됐다. 교회 내부에 ‘돈’, ‘목사(사람)’, ‘조직’에 대한 우상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깨트리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 진리의 배타성은 200퍼센트 동의하고 강조한다. 그러나 성품과 삶에서 배타성을 나타내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관용하고 합리적인 사고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진리는 파수하되 공감과 소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품, 관용, 이런 것들을 목사가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 대한 비정상적 개념 이해 즉, 교회의 가치관으로 말미암은 문제가 큰 것 같다.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녀’다. 교회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닌 사람이요, 공동체다. 교회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함께 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타교회, 그리고 세상에도 섬김이 나타나도록 삶의 영역에서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영적전투다. 빛의 자녀처럼 사는 것이 영적전쟁이다.

교회론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돼야 한다. 신학교에서 이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러나 용어로는 배웠으나, 용어의 의미를 배우지 못했다. 의미를 풍성하게 모르니 목회현장에 적용이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본질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다. 교회는 사람이다. 사람을 세워가고,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목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의 본질이기도 하다. 개신교의 타락은 하나님 나라와 사람에 가치를 두지 않고 건물에, 조직에, 행정에 집중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건물로서 성전은 없다. 그저 예배당이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이 서슴없이 예배당에 성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용어적인 면에서도 이처럼 변질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신학교에서도 제대로 배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당을 성전으로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건물과 프로그램이 목양을 대신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같은 목회자로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며, 교회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일단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목사 후보생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목회현장에서 부흥이나 성도들의 헌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목사의 마음이 신학보다 앞서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펴는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보다 부흥을 앞세우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교회의 사명은 부흥이 아니라 교회다움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성장 논리에 함몰되어서 교회성장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순에 빠져있는 거다.

그리고 한번 잘못된 길로 가다보면 되돌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한 경험을 한 분들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고 있고, 교회성장을 열망하지만 못하고 있는 수많은 다수의 목회자들은 오늘도 성장 프로그램을 쫓아 각종 세미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나 부흥회, 집회들은 파리가 날리는데 목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와 세미나들을 성황을 이루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딱히 대안이 없다. 교회 성장을 목회의 중심에 놓고 있는 목회관을 바꿔야 한다. 성장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인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추구해야 할 바른 목회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고착화된 전통과 성장 일변도의 잘못된 교회관, 교회 문제의 총체적 표출 등으로 인해 최근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교회들이 한국에서도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 실제 이러한 교회들이 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새로운 세대에는 분명히 대안적인 요소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면,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일상 신학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개척 교회가 부흥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신학교를 막 졸업한 분들이나, 오랫동안 개척을 해왔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분들에게는 새로운 교회로 교회 형태를 전환함으로써 소망이 되고 있다.

또 전통적인 교회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였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 대안적인 교회로서 그런 교회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소위 가나안 성도들에게는 그런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는 거부감이 없다.

다만, 이런 새로운 교회의 형태가 기존교회와 마찰을 하지 않고 맡은 영역이 다르지만 서로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쓰임을 받는다는 공감대가 생기면 좋겠다.
 
▲한국 교회는 신학과 교리, 교단의 틀에 치우치다보니 무한한 복음의 능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회 회복을 위해서 대안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는 진단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리를 무시하거나, 교리가 문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 개신교(개혁교회)의 교리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다. 그것은 이미 500년 동안 검증이 되어 온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교리에 따르는 삶의 변화인 거다. 개혁교회의 신학에 도전했던 알미니안주의 신학에는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인본주의적이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이 노출되기도 한다.
복음과 교리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다. 실제로 바울서신과 복음서를 교대로 읽거나 강해설교를 해보면 분명하게 알게 된다.

기독교는 교리가 복음이고, 복음이 말씀이다. 목회자들이 교리를 본문에서 녹여내지 못하는 것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과 가치관 추구를 위해 서부중앙교회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주로 말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말씀과 관련해 덧붙이자면 설교는 모든 부교역자들도 강해설교하게 한다. 설교에 집중하면 확실하게 변한다. 주제가 필요한 요소는 성경공부를 통해 한다. 70개의 주제를 갖고 성경공부를 하며 신앙적 궁금증을 해소시키고 있다. 말씀 나눔은 매일성경 큐티로 나누게 한다.

제자훈련의 목적은 목사의 측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제자다. 소수의 공감대를 형성한 자가 아니라 성도 모두가 제자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람들이 믿자마자 제자로 명명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직선적이다.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돌직구다. 부담은 없는가.

=교회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고 설교한다. 성도(하나님을 믿는 자)가 천국 가는 것이지, 목사(직급이나 계급)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강단에 내려와서는 권위를 부려서는 안 된다. 부교역자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약점과 실수 그대로를 인정한다. 당회장으로 지칭하지 못하게 한다. 직함을 강조하는 것은 권위주의에 빠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설교 원고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인들에게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은 강요나 강제하지 않는다. 간혹 진보와 보수가 걸린 정치문제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때가 있더라. 그럴 때 보수도 진보도 아닌 기독교인이라고 강조한다.

말씀의 권위에는 확실하게 질서가 잡혀있다. 진리나 교리적 문제가 있다면 지적을 하되, 진영논리는 태클 걸지 말라고 한다.
 
▲강해설교를 하다보면 난해구절, 교회 상황에서 피하고 싶은 본문이 분명 있을 텐데, 이럴 땐 어떻게 하는가.

=비켜가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본문을 전부 다 다루려고 노력한다. 대신에 그것이 나의 목회와 반대되는 것이라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런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목사인 내가 문제이기 때문에 늘 말씀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고 본다. 말씀을 비켜가야 할 정도라면 내 목회관과 신앙관을 고쳐야지.
 
▲설교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본문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본문해석을 잘하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본문 묵상과 개인성경연구(PBS)를 충분히 한다. 큐티를 통한 묵상은 80년부터 시작했으니, 34년 넘게 하고 있다. 주석은 분야에 맞게 선별적으로 참고한다. 성경본문은 원어프로그램으로 참고한다. 학문적인 책도 함께 읽는다. 설교의 모든 기저에는 깊은 묵상을 토대로 한다.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밑줄을 그으라는 등 성경공부 시간에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일부러 그렇게 한다. 말씀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깨끗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질문을 하면 본문을 보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도 밑줄을 그으라 한다. 서신서는 특히 그렇게 한다. 스토리가 있는 본문은 전체를 두고 하지만 서신서는 한 단어, 한 문장이 심오하기 때문이다.
 
▲요즘 설교 표절 문제가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설교 표절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울러 표절하지 않기 위해 개인적으로 하는 노력은.

=설교에 표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목사 후보생시절이나 목회 초년에는 설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르침 전반과 목회철학과 방법까지도 배워야 한다. 배움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멘토를 모방하는 것임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평생을 모방만 한다는 것은 문제다. 교회 부흥이나 성도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설교를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이것이 설교 표절의 유혹의 원인이 아닐는지. 막상 자기 자신이 좋은 설교를 만들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예를 들면, 한국에는 수많은 설교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나 세미나, 그리고 학교들이 있다. 고액의 강의료를 내고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거기서는 됐는데 돌아와서 자기 교회에서 해보려고 하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근본 문제는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배울 때에 실제적인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설교의 역사나 설교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운 다음에는 곧바로 설교 실습으로 들어가서 학점으로 판단해버리기 때문에 효과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칠 때 너무 학문으로 가르치지 말고, 실제 설교를 가르쳐야 한다.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본문을 읽는 방법과 실습 ▲본문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법과 실습 ▲그 본문에서 어떻게 메시지를 뽑아낼 것인가? ▲중심 메시지를 어떻게 본문을 가지고 살려낼 것인가? ▲그 메시지를 설교적인 적용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메시지 전달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덧붙여 ▲이 모든 것들 위에 목회자들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얹어져야 한다. 그리고 ▲설교와 현실을 연결하기 위한 방법들 등등 설교에 관하여는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학자들의 주석이나 명설교가의 설교를 많이 참고한다. 설교에 대해 강의할 때에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다만 출처를 밝히거나, 적어도 이것이 인용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관건은 성경에 대한 묵상이 깊어져야 본문에서 메시지도 길어 올릴 수가 있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다.
 
▲반복되는 대답이 바로 '신학교 개혁'인 것 같다. 한국 교회의 얽히고설킨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긴 호흡을 갖고 신학교부터 변화시켜 나가야한다는데 공감이 간다.

=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총신 교수들을 뽑을 때도 지역이나 인맥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실력으로 뽑아야 한다. 또 실력 있는 교수들을 정치적으로나, 힘 있는 사람들의 사적인 감정으로 흔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나아가 총회에서 신학교 이사들을 세울 때는 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한 신학적 소양과 균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총신의 신학이 좀 더 개혁주의적이면서 오늘의 현실에 적실하게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학문의 폭을 넓혀주어야 한다.
급진 개혁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적인 사건이 필요하지만, 점진인 개혁은 결국 신학교와 총회 총대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본다.
 
▲과거 총신 신대원 시절 <제자선교회> 창립멤버였다.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전국에 걸쳐 선교회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신대원 시절 신학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갈등하던 전도사들이 답을 찾아가기 위해 모임을 가진 것이 시초였다. 현재 각 지역별 정기모임과 수련회 등을 통해 성경연구와 선교협력과 같은 활동을 하고 있다.

선교회에 오면 선후배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거의 평등한 입장에서 모임을 갖는다. 발언이나 관계 모든 면에서 그렇다. 말씀 앞에서 서로 형제 같은 유일한 모임이라 말한다.

늘 말씀을 묵상한 것을 나누고 선배급들이 돌아가며 강의를 한다. 선배들은 묵상과 관련한 중요 주제를 강의하거나 목회적 나눔을 한다. 수련회를 공짜로 3박 4일간 실시한다. 선교회에 속한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용적으로 질 높은 수련회를 진행한다. 선교회 덕분에 교단을 초월해 최신 신학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축복이다.
 
▲‘아웃리치 섬김의 예배’라는 것이 참 독특하게 느껴진다. 후원교회에 대한 우월적 지위에서 행하는 시혜가 아니라 형제의식을 갖고 동역하는 의미인 것 같다.

=전도사 시절부터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교회는 전체가 하나의 교회라는 의식 갖고 있었다. 시골 출신으로서 시골교회를 섬기고 돕는 방법 중에 연대가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진안에서 목회할 때도 그렇게 했다.

아웃리치는 시혜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 보편적으로 봉사활동을 하지만 베풂의 의미로 가면 받는 쪽도 기쁘지 않다. 형제관계처럼 예배를 함께 드림으로 격려하는 것이 아웃리치 섬김의 예배의 목적이다.

의외로 반응이 좋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찾아가면 시골 예배당의 빈 공간이 꽉 채워진다. 이 자체만으로도 시골교회 목회자가 힘을 받는다. 우리가 가면 시골교회에서도 융숭하게 대접해 준다. 상호 섬김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교회가 교세가 많이 늘었지만 아웃리치 참여하는 인원은 상대적으로 늘지 않아 고민이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사역 가운데 가장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예배와 교육 외에 특별한 행사가 거의 없다.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보람된다. 성도들이 분별력이 커지고, 변화하는 모습이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기쁨이 크다.
 
▲목사로서 갖는 인간적 고뇌는 없나.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편적인 고뇌라 생각한다. 전라도 말로 ‘거시기’할 때가 많다. 목회를 하다보면 변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힘 빠지게 할 때가 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면 목사로서 권위를 내려놓으면 인간적인 대접은 약한 것은 사실이다.(이 부분에서도 노재석 목사는 상당히 조심스러워 했다.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기 때문에서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첨삭 여부 고민 끝에 넣기로 했다. 질문 자체가 인간으로서 목사의 고뇌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대답이 그의 진심임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그럼에도 자발적이고, 기쁘게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
 
▲목사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다면?

=60평생에 가장 큰 터닝 포인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주 부요하게 살았다. 돌아가신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고 2때에는 1년 내내 밥구경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당시 정부에서 주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동생 네 명 모두 친척들 집에 뿔뿔이 흩어져 살기도 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때 온가족이 회심해 예수를 믿게 됐다. 가난 속에 예수님을 만났다. 교회가 아니면 소망이 없었다. 교회는 소망이었고 구원이었다. 이것이 내 일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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