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원 교수(총신대학교)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

 

 

지난 추석, 민족의 대이동을 보면서 “공항에 가면 고향에 온 것 같이 느낀다”며 쓸쓸히 웃던 지인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네덜란드계 혼혈인 미국 선교사 자녀로 어려서부터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홍콩 등지를 떠돌았고 지금은 미시간에 삽니다. 그만큼은 아니라도 지금 우리는 모두 떠도는 삶에 젖어 있습니다. 고향에 살아도 급변하는 환경 탓에 삶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新)유목민 문화

유동성이 커진 오늘날 우리는 모두 고향을 잃었습니다. 한 작가의 말처럼 성공을 위해 위로 올라가고 여차하면 떠나는데 익숙해져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언제든 어디로나 훌훌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풀을 다 뜯어 먹은 지역을 뒤로 하고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살아갑니다.

유동성이 커진 가장 큰 이유는 교통의 발달 때문입니다. 너 나 없이 마치 발에 바퀴가 달리고 등에는 날개가 달린 듯 세상천지를 자기 앞마당처럼 넘나듭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같은 첨단 미디어의 발전도 고향을 잃는 일에 일조합니다. 현장 영상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웹캠이나 구글맵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 세계 어디든 볼 수 있어 거리감각이 무뎌집니다. 인터넷 서핑이란 온 세상을 휩쓸고 다니는 현대인의 유랑기질을 잘 표상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제공하는 기업들도 문화적 유동성을 높이는데 크게 일조합니다. 점점 신제품 개발과 출시 간격이 짧아지는 전자기기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내어놓아 멀쩡한 것을 계속 교환하도록 부추깁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환호하며 따라가길 좋아한다는 이른바 얼리 어댑터(early adaptor)들조차 그 변화와 비용을 감당하기 점점 어려워집니다.
 

여행과 유랑

지난 날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틀 위에서 주위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시대에 동일 지역에서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정체성의 토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한 지평 확장은 전통적인 정체성을 심각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세계가 이웃이 된 오늘날 지구촌에선 정작 옆 사람과의 사귐을 잃고 있습니다.

유동성에 길들여진 사람은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불안해합니다. 직장이나 교회도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한 환승역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늘 남의 초장이 더 푸르게 보이고 무지개는 항상 산 너머 있게 마련입니다. 작은 실망이나 상처를 받으면 당장 모든 것을 팽개치고 떠나갑니다. 늘 개인의 복리와 평안만을 추구하며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이런 문화 속에선 삶에 필요한 안정을 얻기 어렵습니다.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얼마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지는 투기성 자본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가장 잘 보여줍니다. 국제전자금융은 초원을 떼지어 달리는 들소 떼에 비교되곤 합니다. 지극히 작은 수익률 차이에도 천문학적인 돈들이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생리 때문입니다. 그것도 합리적 판단에 따르기보다는 대개 손실에 대한 불안심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민한 유동성은 우리가 외환위기 때 겪은 것처럼 순식간에 한 나라의 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귀향과 영혼의 고향

요즘엔 모두들 유동성 문화 속에 지쳐서인지 쉼과 정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승려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한 기독교 작가도 유동성 문화를 비판하는 책에서 “뭔가를 끝없이 찾아 다니는 생활을 언젠가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진과 유랑은 다른 것입니다. “자꾸 움직인다고 해서 약속의 땅에 다다르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너 나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삶 속에 안정을 가져다 줄 영원한 본향이 어디인지 생각해봅니다. 스스로를 이방인과 나그네로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이 터를 닦고 지으시는 성을 바라보았던 구약의 성도들 족장들은 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했지만 영원한 고향을 품었기 때문입니다(히 11:13~16). 반면에 에덴 동쪽에 머물며 성을 쌓고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던 가인의 자손들은 결국 바벨에서 흩어짐을 당합니다. 영혼의 고향을 찾지 못하는 방랑과 흩어짐의 영성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임을 고백합니다. 산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며 아버지가 되신 주님이 우리의 본향(시 90편)이라 했습니다. 정주하려면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견고케” 하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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