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정조준했던 이라크에서 800일
그후, 늘 깨어 하나님 섭리 되묻고 있다


외무고시 수석이었던 평생 외교관…귀국 후 총신신대원서 ‘제2의 임무’ 준비
‘위기관리 대사’ 활동하며 다양한 선교·봉사… “교회, 낮은 곳에서 함께 해야"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모 교회에서 실시하는 목회자 모임에서였다. 그를 소개해준 오치용 목사는 그를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늦깎이로서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려고 한다며, ‘보배’라고 소개했다. 이순(耳順)을 넘은 분이 신학을 한다니까 일단 관심이 갔다.

그리고 그가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중에 1년에 서너 차례씩 만나 소소한 얘기들을 함께 나눴다. 한국 교회와 관련된 얘기부터 선교, 거기다 신앙인의 삶까지 미주알고주알 공유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울림’을 알게 되었다. 깊이가 달랐다. 장기호 목사(왕십리교회·협동).

그는 인터뷰를 하기 직전에도 정신병 환자가 입원해 있는 <아름다운 미래병원>을 찾아 꿈과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고 왔다며 바쁜 티(?)를 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여 이래저래 말들이 많지만, 솔직히 신학적인 부분은 제외하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도록 이끈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기독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고 봅니다.”

그는 뜬금없이 교황 얘길 꺼내더니 기독교가 제도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성금을 전달하는 것은 봤어도 힘든 약자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제대로 못 봤다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그것을 끌어안는 포용이라고 설명했다.

낮은 자, 고통받는 자, 자생력을 잃어버린 자들이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합류하도록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우리는 뒷짐을 지고 있는지 의아할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덕목조차 잃어버린 교회의 아픔을 보면서 그는 어쩌면 한국 교회도 곧 마이너리티로 전락할 것 같아 안타깝다고 설명했다.

“거창한 계획은 없습니다. 병원을 돌아가며 환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겠습니다. 병을 고치는 의원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고치는 의원도 중요하니까요.”
장기호 목사, 그는 원래 외교관이었다. 1964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하여 1971년 외무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다.

외무부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일명 ‘김대중 사건’의 자료를 청와대에 제출하는 일을 맡았다. 정치적으로 하도 민감한 사안이라 몸무게가 쑥쑥 빠질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를 동경하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첫 외교지로 선택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당시 한창 개발 열풍이 불어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오일머니 국가로 급부상 중이었으며, 한국 외교 또한 친 이스라엘에서 친 아랍 외교로 바뀌고 있어 무척 중요한 시점이었다.

 “한국 기업을 돕고, 세계 각국의 요인들을 만나 외교를 했습니다. 비록 신임 외교관이었지만, 당시 한국 경제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자부심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는 외교본부에 있을 때 KAL기 폭파사건을 담당하고, 주미국 통상국장, 주제네바 WTO 대사, 주캐나다 대사, 주이라크 대사 등 굵직굵직한 외교업무를 맡아 국익을 돕는데 일조했다. 그 가운데 그는 테러와 전쟁을 선포하며 생과 사를 넘나들던 주 이라크 대사 시절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출발부터 내키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대사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반기문 외교부장관(현 유엔사무총장)이 이라크 대사를 맡아 달라고 떠보더군요. 펄쩍 뛰며 갈 수 없다고 했죠. 그런데 다음날 새벽기도 때에 자꾸만 이라크가 떠오르는 거예요.”

그는 마음을 바꾸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알고 이라크에 자원했다. 이라크는 당시 무역회사 직원인 김선일 씨가 피살된 곳이며, 우리나라 자이툰 부대원 3500명을 파병한 한미동맹을 실현하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이라크 대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척 중요한 시기였다.

“바그다드 티그리스 강가에 매일 100명이 넘는 처형당한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봤습니다. 미국과 동맹을 맺은 국가의 국민은 테러의 타깃이라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이라크에 부임하여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며, 그 때마다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말했다.

“쿠르드족 장관을 만나고 헬기를 타고 돌아오는데 테러리스트들이 조준사격을 하며 기관총을 난사하는 거예요. 총탄의 섬광이 번쩍거려 앞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며 무조건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라크의 800일 생활이 자신을 뒤돌아보고, 신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총에 맞아 죽은 전쟁고아와 압제 당하는 식민지인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참 고민도 많이 하여 이라크를 벗어나면 하나님을 뜻을 알아보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무탈하게 이라크 대사직을 수행하고 귀국하여 바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20대 젊은 친구들과 함께 경쟁을 하며 똑같이 생활했다. 동계 어학연수도 빠지지 않고 수료하고 1년간 기숙사 생활도 했다. 체력이 고갈될까봐 늘 염려하면서 힘들면 기도로 극복했다. 오로지 하나님을 알기 위해 매진했다.
 그는 외교관의 중임을 통해 평생 배운 지식을 토대로 현재 위기관리재단 이사장을 맡아 선교사는 물론 재외국민의 안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수시로 위기대처 지침을 제시하고 위기관리시스템을 가동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주며 ‘위기관리 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젊은이도, 교단과 한국 교회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다 놓칩니다. 무엇이 공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 늘 깨어서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는 외교관의 중책을 마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인 4역을 감당하고 있다. 정신병원에 나가 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서울역 노숙자들을 만나 꿈을 심어주고, 위기관리재단을 맡아 안보대사로 활동하고, 북한선교를 위해 중국 모 교회의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 내년이면 고희(古稀)인데 이제 시작이다.

“세상을 바로 보는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 생각하면 또다른 세월호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그는 서울역 노숙자를 만나러가야 한다며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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