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원 교수(총신대학교)

 
절제는 은혜, 감사하며 누리세요

 

 

세상의 아픔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한탄하거나 가진 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 중 하나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어린애 둘이 동네가 떠나가라 울며 싸웁니다. 형이 백 원짜리 동전을 주웠는데 동생이 그걸 뺏으려다 울자, 형은 안 주려고 더 크게 우는 것이랍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이렇게 탄식했답니다. “애나 어른이나 다 똑같아!”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우리 사회도 같은 문제로 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절대 빈곤을 벗어난 오늘날, 배고픔이 아니라 배아픔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바른 물질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언 끝자락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는 우리 시대에도 귀한 모범이 됩니다. ‘가난하게도…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30:7~9).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주님의 기도와 정신이 다르지 않습니다. 두 기도 모두 경제적인 면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땀을 흘려야 필요한 양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려도 가시덩굴과 엉겅퀴들은 삶을 어렵게도 하고 때로는 위협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수고를 기울여도 햇빛과 비의 적절한 은총이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사는 인생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양식뿐 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닌 이상, 건강, 공부, 사회적 지위, 가족관계, 의무, 자녀 등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을 위해서도 늘 기도해야 합니다.


상대적 박탈감

우리나라도 요즘에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 배고픔 때문에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지만 과거보다 생활 여건이 비교할 수 없게 나아졌는데 오히려 행복지수는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사회적 공감대가 깨지고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다 보니 너 나 없이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일류대학원생이 교수의 컴퓨터를 해킹해 수석을 유지하다 발각된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람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노예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회사가 파나마로 공장을 옮겼는데 노동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주는 임금의 두 배 정도를 주었답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주 일하면 그 돈으로 한 달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먹고 살만큼만 일을 하던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임금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심 끝에 나온 해결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명 백화점인 시어즈 카탈로그를 나눠주고 물건을 사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미국제 물건을 사기 위해서, 시간외 근무(overtime)를 자원하는 사람이 줄을 서더라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파나마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단순성의 문화

많은 이들이 탐욕에 빠져 삶이 왜곡되곤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함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딤전 6:17)고 했습니다. 재물은 날아가 버릴 수 있고 누리기 전에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무병장수하며 오래 오래 모든 것을 누린다 한들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갈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도리어 먹고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 했습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에는 탐욕으로부터 풀어주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그것을 ‘단순성의 정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단순성이란 돈과 십자가를 같이 지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한 가지 삶의 목적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삶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길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탐욕과 소비와 허영으로 둘러싸인 문화 속에서 복음을 몸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이 기도에 담긴 단순한 삶의 풍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결국 물질에서 만족을 찾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지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감사로 누리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와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고후 6:10), 모든 형편에서 자족하기(빌 4:11)를 배워야 합니다. 탐욕에서 해방되어 매사에 절제하되 일용할 양식을 감사히 받고 주신 바 재물을 선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관대하고도 기꺼이 주는 봉사의 삶입니다. 탐욕을 넘어서는 기독교적 성숙한 문화는 믿음으로 단순한 삶을 은혜로 받아 감사로 누릴 때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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