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신나는 도전 … 내겐, 그것이 음악

참 밝았다. 그늘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밟는 곳은 언제나 길이 되었듯이 그는 또한번 ‘대형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그것도 그가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대한민국에서.

▲ 심포니 송’ 창단연주회 앞두고 설레…음악 갈증 제대로 풀 것삼양동 빈민촌 교회서 보낸 유년시절은 계속된 도전 원동력세상과 교감하며 ‘열정 가지고 활기차게’ 달란트 환원할 터

지휘자 함신익(57·예일대 교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에 묻혀 사는 그의 천성 탓도 있지만, 오는 2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심포니 송(Symphony S.O.N.G) 창단연주회를 앞두고 이상하게도 소풍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 마냥 하루하루를 설레임 속에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제가 해 온 음악은 수습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음악을 제대로 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니까 신나고 흥분됩니다.”

그는 자기 위치에서 뻗어 나가려고 발버둥도 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조차 싫어할 정도로 늘 의욕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두려움이나 좌절을 잘 몰랐다. 단원들과 불화 끝에 KBS교향악단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 의기소침해 있을까봐 노심초사 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역시 활기차고 꿋꿋했다.

“제가 가는 길은 모두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솟아나는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뛰어난 열정이 있는데 그것을 찾지 못해 힘들어 한다면서 진정한 승리란 어려운 시련을 극복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날 때 아버님이 주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란 성구를 지금도 가슴에 품고 다닌다면서 한번 목표를 세우고 모든 것을 던져 돌진하다 보면 희한하게 일이 풀린다고 고백했다.

다시 말해 기회는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고, 도전적으로 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클래식 기반이 빈약한 한국에서 심포니 송을 창단한 것도 그런 그의 ‘돌직구형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신익은 신의주에 살다가 1·4후퇴때 피난을 내려와 부모님이 정착하신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단독목회를 하시던 덕소교회를 거쳐 충현교회 청년부가 개척한 삼양교회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은 그에게 모두 별천지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군용텐트를 지원받아 십자가를 설치하고, 기둥에는 종 대신에 빈 가스통을 매달아 무허가 빈민촌에 교회를 세웠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천막을 찢고, 심지어 아예 뜯어가는 불량배들도 있었지만, 교회 종소리는 어김없이 이재민, 철거민, 생활고에 찌든 사람들이 모인 달동네로 울려 퍼졌다. 삼양동은 그럭저럭 견디다가 훌쩍 떠나는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그런 동네였는지 몰라도 지휘자 함신익에게는 삶의 자양분이었다.

“단벌 양복에 고무신을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마을을 누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마이크도 없이 쩌렁쩌렁하게 쏟아내시던 아버지의 설교가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이제야 느낍니다.”

▲ “제가 가는 길은 모두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솟아나는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랬다. 지휘자 함신익에게 삼양동은 암울한 빈민촌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이었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유학길에 올라 예일대 음대 교수가 되어 ‘오케스트라의 부흥사’란 명성을 얻을 때까지 오롯이 힘이 되었던 것은 가난했어도 불행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감사하며 살았던 삼양동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마다 한자성경을 읽으며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인들과 소통이 가능한 것도 그 때, 열심히 새벽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풍금을 치며 찬송 부르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피아노와의 만남이 교회가 매개체였다면, 교회는 세상을 연결해주는 비상구였습니다.”

그는 식당 웨이터, 냉동 트럭운전기사, 지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라이스대학에서 석사, 이스트만 음악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스트만 재학당시 그가 지휘의 경험을 쌓기 위해 창단한 ‘깁스 오케스트라’는 미국 로체스터 지역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있다. 애벌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조직의 혁신을 꾀하며 지역 문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점은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전형이라는 평가다. 오죽했으면 애벌린시에서 ‘함신익의 날’까지 선포했을까?

대전시향의 예술감독을 맡아 클래식의 높은 장벽을 허물었던 점도 빼놓을 수가 없는 사례다. 그는 청중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마스터즈 시리즈, 디스커버리즈 시리즈를 잇따라 기획물로 내놓고 연주회장에 청소년을 끌어 모았다.

연주복을 벗어버리고 축구복에 운동화를 신고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객석에 축구공을 차서 보내주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를 두고 지휘자가 클래식의 문턱을 낮췄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지휘자의 돌출행위라는 비난도 거셌다.

“음악이란 즐겁고 신나야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 해도 청중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무대와 객석의 간격을 좁히는 일을 고국에 돌아와 대전시향에서 부대끼며 시도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군림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청중과 교감하는 지휘자로서 자리를 잡아왔다. 그러나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당시 단원들의 레슨제한, 연습시간, 오디션 등을 놓고 불거진 갈등은 그에게 아물지 않은 상채기로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심포니송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음악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에게 무료 레슨을 해야 하며, 작은 연주회도 열어야 합니다. 청소년들과 멘토십을 형성하고 기업과 연결하여 악기를 대여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재정 문제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능있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음악에서 소외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며, 단원들의 무료 레슨을 거듭 강조했다. 또한 교육청과 연계하여 초중고를 방문, 청소년 음악회를 개최하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거기다 ‘고급’으로 대변되는 음악의 풍토를 보통사람들의 눈높이로 바꿔보겠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논현동 연습실도 원래 술집이었는데 건물주가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혀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피아노, 타악기, 보면대, 각종 집기, 방음벽 설치까지 모두 개인과 기업의 협찬으로 이뤄졌습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해야죠.”

참, 이번 심포니송 창단연주회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로 구성되어 있다. 19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입상했던 피아니스트 백혜선을 비롯하여 소프라노 이명주, 메조소프라노 추희명, 테너 이명현, 바리톤 김동섭 등이 출연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함토벤> 책에 사인을 요구했다. 그는 거침없이 ‘알레그로 콘브리오’(Allegro Conbrio). “열정을 가지고 활기차게”라고 큼지막하게 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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