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터뷰]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한국 교회가 방향성을 잃었다.”

높은 인지도에도 언론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원하는 주제가 아니면 이름을 내기 위한 측면의 언론 노출을 일체 꺼렸던 그가 개편을 앞둔 <기독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던 이유는 바로 방향성을 ‘함께’ 찾자는 의미에서였다.

‘목회’, ‘설교’, ‘한국 교회’라는 크게 세 주제를 두고 김남준 목사와 대화를 나눴다. 아니나 다를까. 현상적이고 총론적인 측면으로 던진 질문에 그는 신학과 교리, 역사, 철학 여기에 목회적 경험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했다. 말 그대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김남준 목사의 한 마디 한마디 속에서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방향성을 함께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과거와 비교해 목회환경이 많이 변했다.
=20년 전 개척할 당시와 비교할 때 지금 목회·선교 상황이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됐다. 무엇보다 개인주의 심화, 감각문화적 환경, 도덕상대주의의 보편화, 기독교의 비우호적 선교환경, 여기에 경제의 풍요가 종교에 대해 진중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개인주의는 개인몰입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인에 집중돼 있다. 공통선을 찾아가기 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평안을 궁극적 삶의 목표로 삼는 개인주의를 강화하는 추세다. 그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평화와 상호를 말하고 있다.

책이나 사색이 아니라 대중매체에 노출된 채 감각주의 문화에 함몰돼 있다. 그 결과 기발한 발상은 많아도 깊이 있는 사상이나 분석은 나오지 않는 시대가 됐다.

도덕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주의로 보고 있다. 단순히 기독교윤리가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이 현대 사고와 코드가 맞지 않다. 이런 추세에 교회들이 본질을 양보하고 다원화에 맞추다보니 기독교의 힘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될 것으로 본다.

▲이 시대가 목회자는 넘쳐나지만 ‘성직’과 ‘목양’의 개념은 약해지고 있다.
=성직이라는 것은 거룩한 직업이다. 모든 만물 위에 초월적이고, 도덕적 완전을 가지신 홀로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거룩해 질 수 있다. 자신이 미천한 존재임을 알고,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은 결국 경외하는 생활로 드러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것을 ‘질서 지어진 좋은 삶’으로 표현했다. 정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종교적인 체험과 경험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정돈된 삶이다.

개인적으로 성직은 좋아하지 않는다. 목회자면 충분하다.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별된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성직과 비성직 대조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목회자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표본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살고 사랑하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 가르치기 위해 목회자를 주셨다. 그런데 목회자의 이런 개념은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해지는데 진리의 탐구, 윤리실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삶이 깨지면서 약화되었다. 사상과 윤리,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가질 때 성직자의 고유성이 나타난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목회는 성경을 주신 목적을 승계하는 것이다. 구원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바로 목양이다. 지성, 의지, 은혜의 성숙으로 전인적인 변화가 돼야 한다.

그러나 목양이 부차적이 되어 기독교가 사업화되었다. 기독교의 사역 자체를 사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진리를 가르쳐 사상과 윤리의 성숙, 그리고 희생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목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로 돼 버렸다. 이로 인해 교회에서 중생과 회심의 설교와 선포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성직과 목양 개념 회복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상적, 윤리적 기반을 쇄신해야 가능하다. 본질적 목회로서 갱신이 이뤄져야 한다.

 
▲ 김남준 목사
▲성장기 이후의 한국 교회와 다원화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필요로 하는 목회자상은 무엇일까.
=목회자들이 성경에 대해 탐구하려는 노력하지 않는 것과 함께 현대사회에 대해 너무 공부를 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지만 분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정신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다. 그래서 따라가든지, 배격하는지 극단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추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담론을 거부한다. 형이상학 등과 같은 거대담론을 기득권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시키며 일체 거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사생아다. 이성과 인간의 감성과 의지를 주체로 할 것인가에 대한 차이지만 자아에 중심을 두는 것은 같다.

사람들은 절대적 도덕기준 없이 상대적으로 사고한다. 그러나 인간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때에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거듭난 그리스도인을 말함)이 이것이 진리라는 강공이 필요하다.

지치고 피곤한 현대인에 있어 향락과 부도덕은 정신적·영적 질병이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들려주고 바꿔놓는 주입식 아닌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느끼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적으로 교인을 사상화하고, 삶으로 고백화 되도록 해야 한다. 사상이 삶의 체계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가 우맹·우민주의적으로 진리와 사상과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의 복음이 합리적이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확신을 줘야 한다. 나아가 보편적 인류와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할 수 있는 언어와 고민을 담아야 한다. 교회의 지적수준을 높여야 한다.

▲목사님에게서 설교란.
=설교는 성경진리를 만난 설교자가 토해놓은 한사발의 피다. 성경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설교를 들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과 건전한 신학과 이성으로서 진리를 조직화하여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설교 흐름을 분석한다면.
=설교의 방법론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어떤 설교이든 신학이 있어야 한다. 혼탁한 세태 속에 한국 교회에 올곧게 선포하는 목사님들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탈신학적인 설교를 한다. 신학을 제거하고, 감동을 주고, 행동하게 하고, 삶의 개선을 도모하게 하는 설교다.

여기서 탈신학적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신학을 제거하면 윤리적 설교가 된다. 그러면 죄의 개념 사라지고 현실에 대한 부적응과 불편함, 선이 아니라 내게 좋은 것 등 인간의 자율과 가능성을 격려하는 설교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큰 흐름이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불붙은 신학, 불붙은 논리다. 사상을 전하는 것이 설교다. 대신 성경전체에 흐르는 사상을 선택한 성경에 해석하는 설교를 해 구원받고, 인격과 삶이 온전해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므로 철저하게 설교는 신학에 뼈대를 넣어야 한다. 탈신학, 탈사상 설교를 하게 되면 기독교가 무엇을 믿으며, 하나님은 누구시며, 세계와 관계, 절망의 의미 등 통일적 이해가 없어진다. 결국 뼈대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릇모양 마다 모양이 바뀌는 낙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린다.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라는 주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고충이 있을 것 같다.
=한사람은 설교자이기 전에 연약한 인간이다. 연약한 인간이 외치는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이 되기 위해서는 길게는 일평생, 짧게는 한 주간 설교를 따라 살아가는 몸부림치고, 애쓰고, 분투하는 피 흘리는 삶이 깔려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 역시도 넘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진리를 사랑하고 삶을 일치시키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에는 신학과 교리가 짙게 배여 있다. 여기에 감성적 요소도 크다.
=우선 감성적 요소 부분인데, 인간이 감성이 없다면 어디 인간이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가족이 다쳤을 때 그 상황을 그저 이성적으로 이해했다고 끝낼 수 있나? 걱정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설교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말씀이라면 인간의 마음을 출렁이게 만들어 정돈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감성적 요소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저는 교리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설교한다. 그러나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 속에는 신학과 교리가 있다. 그것이 없으면 설교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설교의 목표는 기독교사상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 전체에 적용해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을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설교의 이유라 믿기 때문에 신학과 교리 설교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설교정보는 넘치는 시대지만 설교의 질은 낮아지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설교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 있다면.
=설교자 자신이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한다. 거룩과 비참함을 깨달아야 한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지식이 성도들 우위에 있어야 한다. 성경의 탁월한 지식, 교회역사, 원어, 기독교사상과 일반철학, 인문학, 자연과학 이해 등 총체적인 수준을 가지되, 성경을 가장 높이고 거기서 핵심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 지식의 자랑과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한다. 피나는 삶의 실천을 하다보면 기도할 수밖에 없다. 겸손해지는 것이다.

회중의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사회를 이해하고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 의존적인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성경진리를 의존하는 사색과 묵상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학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성경해석은 성경저자의 전달의 의미, 원어에서 나타나는 원래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그 이후 오늘에 대한 이해의 방법을 찾고, 그 다음이 적용이 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해석을 적용으로 대신해 버렸다. 성경과 관련은 있지만 성경을 떼어내도 이야기가 되는 것이 지금의 설교형태다. 성경본문에 대한 깊은 해석이 있어야 한다.

▲설교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설교비평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설교는 비평이 아니라 좋은 설교를 많이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이 좋은 설교를 하는 비결이다. 비평과 토론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로운 예배 자리에서 바뀐다.

▲한국 교회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회복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신학교육이다. 위에서 흐르는 흙탕물을 막아야 근본적으로 정화가 된다. 그래서 신학교육이 제대로 돼야 한다. 신학교에서 신앙 갖는 의미, 지향하는 참된 하나님의 지혜의 요체,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목회하며 사람과 관계할지, 세상에 영향을 끼칠 방법 등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윤리적 행동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성장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성장을 목표하는 것은 타락이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많이 모이게 하고, 강력한 힘을 가져 세속의 권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벨론의 정신이다. 예루살렘의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정의와 사랑이 있는 것이 가치다. 크기를 쪼갠다고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감동과 신선함을 주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본질로 돌아간다면 나누고 크기를 제한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주의(~ism)’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형식은 본질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이바지할 것인가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 본질과 형식의 혼돈을 막아야 한다. 작아도 세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교회론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실현해가고 있나?
=교회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에 접붙여진 몸이다. 그리스도가 머리다. 예수의 통치를 받고, 생명을 나눠져야 하고, 각 신자들이 한 몸이라 생각하고 사랑하고 공동체성 속에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 개념 없이 교회도 없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천국으로 낙점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원대한 사명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몸 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위해 분투하고 사는 것이 사명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이다. 교회는 그 틈에서 실현하도록 하는 도구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사랑의 확장이다. 사랑과 통치, 영적 자원을 보여주는 것이 선교이고, 교회의 근본가치다. 교회는 처음부터 공동체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공공성과 공적신앙을 이야기할 필요 없다. 교회 회복만이 근본적으로 공공성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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