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진 목사

 
“나, 청량리 깡패 잡으러 온 전도사요”


▲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던 김도진 목사는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진은 삼각산기도원 집회에 참석한 모습.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귀국한 후, 삼각산기도원에서 목사님에게 신학을 권유받았지만 당시 내 생활은 여의치 못했다. 네 식구가 월셋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어, 목회자의 길을 거부하고 싶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자, 목사님은 “하나님은 광야에서 200만 명을 때를 따라 필요를 공급하여 주셨다”고 훈시하듯 말하셨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 그 말씀에 감격했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관은 또 있었다. 신학교를 가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나는 졸업 3개월을 앞두고 4·19민주혁명에 적극 가담해서 지명수배자 신세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군에 입대를 한 이후로 한 번도 학교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졸업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몇 년도 B반 김도진 졸업생이라고 소개하고 졸업증명서를 발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을 위해 졸업장이 필요한 이유 등을 적은 편지를 써서 우표 20장과 동봉해서 보냈다.

일주일 만에 답장이 왔다. 답장에는 졸업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 입학금이 들어 있는 봉투가 하나 더 있었다. 기적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담임 목사님의 전화가 걸려 왔다. 빨리 교회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내 멱살을 잡듯 신학교로 데리고 가서 입학원서를 쓰게 했다.

신학교 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그러나 시험지에 답을 제대로 적지 못했다. 시험감독관이 어떻게 이런 답안지를 냈냐고 했다.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알콜중독자로 싸움을 하며 살았던 삶과, 예수님을 만난 후 뉴스도 신문도 보지 않고 매일 성경만 보았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내 말을 듣던 교수들은 시험점수와 상관없이 특별히 합격을 시켜 주셨다. 이렇게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신대원을 졸업할 때가 다가왔을 때, 목회자로서 내 모습을 고민하게 됐다. 나는 은혜를 받았지만 스스로 구제불능 인간으로 생각했고, 깡패와 같은 언어를 좀처럼 고칠 수 없었다. 입만 벌리면 “이 새끼 저 새끼”가 튀어나왔다. 내가 생각을 해도 문제가 있는 말투를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을 만큼 사랑했던 나는 언어습관을 고쳐 보려고 정말 많이 기도하고 금식을 했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셨는지 많은 은사를 주셨다. 은사가 뭔지도 몰랐지만, 병든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서 기도를 해 주고 싶었다. 그 때 병이 낳는 역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는 기회가 됐다. 성령의 역사는 나를 거리에서도, 일하는 현장에서도 온통 전도하는 삶으로 이끄셨다. 전도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도록 하셨다.

어느날 사역을 위해서 6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작정기도가 끝나는 날 새벽예배 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청량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청량리 일대가 얼마나 무서운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청량리는 나에게 또 다른 아픔을 안겨준 곳이기도 했다.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한 곳이 바로 청량리였다. 내 삶이 비참하게 된 그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래도 아내에게 교회를 개척하러 간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돈있느냐? 아는 사람이 있느냐?”라며 걱정했다.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것 하나만 믿고 그대로 청량리로 나갔다. 청량리행 버스를 타고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업에 실패해서 청량리를 떠나던 비참했던 신세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갈 곳이 없어 방세가 싼 곳을 찾아 송파 시골 동네로 가족을 데리고 갔다. 아내는 알콜중독자인 나에게 시집와서 내가 변화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파출부까지 다녔다. 다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니 견딜 수 없었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어쩌랴. 하나님의 명령으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청량리에 들어섰다. 청량리에 왔지만 무일푼이었고 도와 줄 사람조차 없는데 어떻게 예배드릴 처소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일단 개척교회를 할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온 종일 굶으며 저녁까지 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이 예배 처소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주님이 명령하셨는데 예비해둔 처소가 있을 것이라고, 아니면 담벼락 밑에서 가마니를 깔고라도 전도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결국 교회 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장동 시외버스정류장에 왔는데 후문 구멍가게 옆에 복덕방 간판이 보였다. 나도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파 짜증이 솟구쳤는지도 모른다. 복덕방 간판을 보고 그냥 무작정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나 전도사인데, 청량리 깡패를 잡으러 왔소.” 들어가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던 주인과 일행들이 깜짝 놀랐다. 그런데 갑자기 복덕방 주인은 나를 얼싸안으며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깡패를 잡겠다는 사람이 고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말을 듣더니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어느 건물에 지하실 하나 있다며 바로 임대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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