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부슬부슬 내리던 1885년 부활절 주일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 한국 땅 밟다

 

부활절은 교회에서 그 어느 절기보다 특별하다. 한국교회사 속에서도 부활절은 의미가 깊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부활절 아침 한국 땅을 밟은 사건을 비롯해, 한국 교회 대부흥을 촉발시킨 절기도 부활절이었다. 물론 이런 역사 가운데 잘못 알려진 사항도 있다. 이수정은 최초로 세례를 받은 개신교 신자로 유명하다. 기존에는 이수정이 1883년 4월 29일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용규 교수(총신대)가 검토한 결과, 부활절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부활절은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역사를 이룬 순간이었다. 부활절을 맞아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부활절 사건들을 박용규 교수가 정리를 했다.<편집자 주>

 

1905년 부활절 개성 전역은 부흥의 불길 타올라

1940년 평양은 부끄러운 산정현교회 강제 폐쇄


한국교회사는 처음부터 부활절과 깊은 연관 속에 진행되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한국교회는 부활절에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경험했다.


1885년 4월 5일 ‘선교의 부활절’

한국의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것도 부활절이었다.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1달 후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2개월이 지난 3월 31일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미쓰비시의 트세리오호에 올라 일본 나가사키 항을 출발했다. 그 배에는 이들 외에도 한국을 시찰차 방문하는 회중교회 스커더, 테일러, 고종 황제의 독일 고문 뮐렌도르프, 그리고 갑신정변 사태를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정부사절단이 함께 타고 있었다.

4월 2일 아침 8시 15분 항도 부산이 멀리 시야에 들어왔고, 얼마 후 이들이 탄 배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잠시 부산에 체류한 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의 입국을 축하라도 하듯 4월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한국 땅을 밟은 언더우드 선교사 부자와(좌),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부활절 아침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 가족(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입국과 관련해,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예화로 사용하고 있지만 잘못 전해진 내용도 있다. 이날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교만하지 않도록 나란히 손을 잡고 동시에 육지에 뛰어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그의 아내가 제일 먼저 은둔의 나라의 땅을 밟았다고 기록했다. 누가 먼저 한국땅을 밟았든지, 이날 선교사들은 얼마나 감격에 젖었겠는가! 한국에 도착한 후 바로 아펜젤러는 선교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과 자유를 주시옵소서.”

주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류에게 빛과 자유와 생명을 주신 부활절의 의미가 그대로 담겨 있다. 부활절에 이 땅에 도착한 이들은 혼신을 다해 부활의 신앙을 전했다. 그로부터 17년 후 1902년 아펜젤러가 먼저 주님의 부름을 받았고, 다시 14년 후 언더우드마저 그 뒤를 따랐다.


1905년 4월 23일 ‘부흥의 부활절’

▲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까지 거세게 타올랐다. 1905년 평양대부흥 당시 사경회에 참석한 성도들.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활주일과 부흥운동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1903년 8월에 시작된 원산부흥의 불길은 부흥의 주역 하디가 안식년을 떠난 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개성에서 영적각성이 가장 강하게 일어난 때는 1905년 구정이었다. 부활절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교사들이 교우들과 함께 부활절을 고대하며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자, 구정에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4월 23일 부활절까지 중단되지 않고 타올랐다. 크램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가 기록해야 할 지난해 사역의 가장 고무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인의 영적 상태가 널리 확산된 부흥운동에 의해 대단히 향상되었다는 사실이다. 개성 교구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령의 참된 부으심을 경험하지 않은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이 부흥운동은 구정에 개성교회에서 시작되어 교구의 각 교회에서 7일 동안 연합적인 노력이 계속되어 부활절까지 계속되었다.”

구정에 시작된 영적각성운동은 점점 더 확산되어 부활절 이후에는 개성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개인들이 경험한 것은 다 측량할 수 없다. “교회의 영적인 삶이 대단히 각성되었으며, 그 결과들은 영구적인 축복으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부활절에 자신들의 온갖 숨겨진 죄들을 주 앞에 통회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도착해 이 땅에 빛과 자유와 생명의 복음을 심기 시작했고, 20년이 지난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개성에서 부흥의 불이 타올랐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부활절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최초의 선교사들을 보내주셨고 이어 성령을 충만히 보내주신 것이다.


1940년 3월 24일 ‘부끄러운 부활절’

부활절에 영광스러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일제와 일제에 편승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1936년 부임한 주기철 목사와 그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이 진행되고 있을 때, 평남 경찰부장 세또 도이찌가 평양노회장 최지화를 사주해 산정현교회 폐쇄 작업을 진행했다. 1939년 12월 19일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세또 도이찌는 평양노회로 하여금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을 면직시키고 편하설 선교사를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결의했다. 더 이상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파괴공작을 단행한 것이다.

1940년 3월 24일 부활주일 아침, 평양노회의 결정은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반대 속에서 그대로 집행되었다. 노회로부터 산정현교회 처리를 위임 맡은 전권위원장 장운경이 위원 8명을 대동하고 “금반 형편에 의하여 당분간 산정현교회 집회를 정지함”이라는 평양노회 전권위원장 명의의 경고장을 가지고 산정현교회에 가서 집행했다. 부활주일 산정현교회가 일제에 편승하는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강제 폐쇄된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한국 교회의 배교와 치욕의 사건도 부활절에 일어났다. 1940년 3월 24일 부활절 아침 신사참배에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는 면직됐고 산정현교회는 폐쇄됐다. 이후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진은 일본 신궁에 참배하고 기념촬영을 한 목회자들.


영광의 부활절 역사 이어야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부활주일에 도착했고, 20년 후 1905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개성교회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으며, 다시 25년이 지난 1940년 3월 24일 부활주일 주기철 목사의 목사 면직과 산정현교회 폐쇄를 단행했다. 기독교 최대의 절기 부활절에 역설적이게도 한국교회는 놀라운 영광과 부끄러운 치욕 모두를 경험했다.

이 거룩한 부활주일, 한국 교회는 일제에 편승해 주기철 목사와 평양 산정현교회를 못 박았던 그 부끄러운 역사를 회개의 마음으로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초기 한국교회가 생명을 바쳐 실천했던 영광스런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할 것이다.

정리=박민균 기자 min@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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