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섭 교수(총신대 개혁신학연구센터 원장)

 
‘잘 조직된 영적 예배’ 균형의식 회복해야 한다


16세기 개혁주의자들이 생명 걸고 지킨 예배전통 충실히 따르며 역동적으로 지켜야
칼빈은 경직되고 무질서한 극단적 예배 배격…참예자들에 하나님과 만남 감동줘야


▲ 안인섭 교수
현재 한국 교회의 예배는 몇 가지 문제로 인해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말씀보다 신비주의와 경험주의가 앞서고, 하나님보다 인간이 앞서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못하고, 주일 예배와 삶의 예배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학적으로 옳으면서도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예배로 바꾸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고민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존의 전통적인 가톨릭의 예배는 신학적으로 부당했고 실제적으로도 무기력했다. 참예자는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곧 예배의 개혁이었다. 예를 들어 1550년대와 1560년대 네덜란드 남부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을 갖게 되어 가톨릭의 미사를 거부하고 개혁주의 예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화형이 집행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처럼 개혁주의는 생명을 걸고 예배를 지켜왔다. 그러나 근래에 개혁주의는 신학은 훌륭하지만 실제 예배와는 맞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개혁주의적인 예배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이 시대 예배 회복의 목표이자 대안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긴요하다고 할 것이다.

 

I.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예배 이해
  
평생 북아프리카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했던 어거스틴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교부였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로마 철학과 종교를 비판한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라트레이아’(latreia)라고 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는 “통회하는 마음의 제사”라고 하면서,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강조하고 있다.
예배를 삶으로서의 예배와 공 예배로 이해하는 어거스틴의 예배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의 교회 안에서 선인과 죄인은 세례를 공유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를 논박할 때 칼빈에 의해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II.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예배 이해


1. 종교개혁 시대의 예배

중세 말은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하나의 공적인 교회만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의 미사가 신학적으로 왜곡되어 있었고, 회중들은 모든 예배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경적인 예배 신학을 회복함과 동시에, 자국어를 사용하여 회중들이 직접 찬양하고 성찬의 잔을 다시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예배의 개혁이 곧 종교개혁이었다.


2. 칼빈의 예배 이해

칼빈은 1536년부터 세상을 떠난 1564년까지 평생을 목회하며 신학 연구를 전개했던 교회의 신학자(Doctor Ecclesiae)였다. 당시 제네바는 외부로부터 제네바를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음모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었다. 제네바 내부에서는 칼빈의 철저한 영적 리더십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이런 긴박한 현실 속에서 칼빈은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예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그의 심장을 드리는 심정으로 사역했다.


1) 말씀

칼빈은 그의 제네바 사역 중(1536~1538, 1541~1564)에 무려 2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 특히 그는 생애 후기에 건강이 악화돼 의자에 실려 교회에 오면서도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 칼빈에게 설교는 교회의 영혼(de ziel van de kerk)과 같은 것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의 통로(de van God gegeven weg ter zaligheid)였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에게 전달한다. 이때 설교자의 입은 마치 그리스도의 입(de mond van Christus)과도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은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중요한 방법이다. 설교자는 단지 교리를 제시하거나 성경 해석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말씀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2) 성찬

칼빈은 시종일관 가톨릭의 예배를 비판했다. 칼빈은 가톨릭 미사의 희생제사,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화됨,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비밀 고해성사 등을 신학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성찬론을 세웠다. 이때 칼빈은 루터의 성찬 실재론과 쯔빙글리의 영적 상징주의 사이의 갈등을 통합하면서, 초월해 계시면서도 매우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의 양극성과 동시성을 통전적으로 담아내어 성령론적인 성찬론을 수립했다.


3) ‘영적’이고 ‘잘 조직된’ 예배

칼빈의 예배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은 ‘잘 조직된 교회’(well-organized church)이다. 우로는 로마 가톨릭의 교회론인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 좌로는 만인제사장과 영적 교회론을 극단화시키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과격하게 허무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배격하면서 성경적인 교회론을 가지고 제네바 교회를 세워갔다. 한 마디로 예배는 ‘잘 조직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예배라는 균형 의식이 잘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III.개혁주의의 예배 이해: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예배

화란의 저명한 실천신학자인 헤이팅크(G. Heitink)는 현대 성도들이 “예배를 의미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저 예배당에 가서, 앉아서, 보고, 노래하고, 듣고, 먹을(성찬을 말함) 뿐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외적인 행위들이 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신령한 예배가 회복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화란 개혁주의자들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에 초점을 두고 예배의 의미를 갈파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예배는 ‘만남의 장소’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다. 우리는 예배 의식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며 교통한다. 실제로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난다. 그리고 찬양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과 만난다. 그런가 하면 성찬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주일 예배는 주님과의 예배적인 만남과 성도들간의 만남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성찬도 중시되어야 한다.

 

IV. 나오는 글

개혁주의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창조주 되시고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참예자들 간의 만남이다. 16세기 개혁주의자들은 이 예배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걸었다. 이것은 형식화되고 무미건조해진 예배가 범람하는 현대 교회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예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바른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며, 성찬이 집례되어야 한다. 예배 참석자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면 중세 말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개혁주의 예배는 참예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되, 개혁주의적인 전통(Reformed tradition)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리보다 먼저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사색했고 그 결과로 형성된 것이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가톨릭 교회의 생명력이 없고 경직된 예배 모델도 반대하면서, 동시에 재세례파들이 강조했던 극단적으로 비조직적이고 무질서한 예배도 배격했다. 21세기의 교회도 개혁주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는 역동성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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