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믿음의 자산 잘 지키고 있습니까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인 1914년의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선교부가 전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이 무렵에는 복음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큰 도시나 항구 이외의 지역에도 새로운 교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일본에 의해 조국의 국권이 침탈당한지 5년째, 민족의 희망이 되고자 몸부림치던 한국교회가 교육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 또한 이 즈음이다.
새해를 맞아 바로 100년 전의 조국교회가 우리 시대에 물려준 소중한 유산들을 돌아보고, 우리가 되살리고 또한 후대에 계승해야할 믿음의 자산들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같은 해에 탄생한 김제 만경교회, 서울 이화유치원, 광주 오웬기념각, 대구 교남기독청년회관 그리고 1914년부터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지키기 시작한 추수감사절을 자랑스런 유산으로 선정한다.           <편집자 주>



신문화 향유 중심지 역할 ‘톡톡’

오웬 선교사 업적 기려…기독유적 필수코스로 인기

광주 오웬기념각   전국적인 기독교 순례지로 명성을 쌓고 있는 광주 양림동역사문화마을. 수많은 기독교유적들이 밀집한 이곳에서도 필수 방문코스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1914년 건립된 오웬기념각이다.

▲ 광주를 대표하는 기독교유적이자 문화공간으로 활용되어 온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은 광주를 중심으로 사역하다 순직한 클레멘트 C. 오웬(한국명 오기원)과 그 할아버지 윌리엄 L. 오웬(한국명 오위렴)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건축물이다.

회색벽돌의 2층짜리 건물로 지붕은 미국 남부의 건축물을 본떴으며, 내부는 모서리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대칭 구조로 꾸며졌다. 특히 당시의 보편적인 건축양식을 탈피해, 청중석에서 강단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1층 바닥과 2층 발코니를 설교단을 향해 경사지게 설계한 점이 이채롭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있다.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오기원 선교사는 1909년 장흥에서 순회선교사역을 펼치던 중, 급성폐렴으로 생을 마친다. 그의 별세 후, 평소 자신의 할아버지를 기리는 건물을 짓고 싶어 했던 고인의 유지를 기억한 이들이 힘을 보태 이 건물을 세웠다.

서로득 선교사가 설계하고, 개항 후 한국에 몰려온 중국 기술자들이 네덜란드식 공법으로 2년 만에 건축한 오웬기념각은 당시 광주에서는 유일하게 대형집회가 가능한 건물이었다. 광주 최초의 서양식 음악회인 김필례 피아노독주회가 열린 것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공연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불과 8000여명이 거주하던 작은 마을에서 몇 년 새 30만 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로 급성장하던 광주에서 오웬기념각은 신문화의 산실이자, 젊은 세대들의 탈출구였던 셈이다. 하지만 엄격했던 유교적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웬기념각의 출입문을 두 곳으로 구분해, 북쪽문은 남성용, 동쪽문은 여성용으로 사용한 것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선교 공간으로서 오웬기념각은 평소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의 채플실로, 방학 중에는 달성경학교 교실로 활용됐다. 광주 최초의 교회인 북문안교회가 일제 탄압으로 폐쇄 위기에 놓였을 때나, 양림교회가 장로교단 분열의 회오리를 맞을 때마다 임시 예배처소가 되는 등 100년 역사 속 숨은 사연도 많다.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양림교회 정장윤 장로는 “최근에는 드라마 <각시탈>의 촬영지로 등장하면서 오웬기념각이 다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는 중”이라며 “지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물로서, 선교의 요람으로서 훌륭한 가치를 가진 건축물”이라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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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아교육 역사의 ‘산증인’

한국민 대상 첫 유치원…교사 양성 역할도 진력

서울 이화부속유치원  이화여자대학교 부속유치원(원장:엄정애, 이하 이화부속유치원) 100년은 한국 유아교육의 역사 그 자체이다.

▲ 1985년 2층으로 증축한 현재 이화부속유치원. 이 공간에서 기독교정신이 깃든 교육을 원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화부속유치원은 1914년 1월 7일 이화학당과 인접한 손탁호텔의 한 방을 보금자리 삼아 100년 역사의 서막을 올렸다. 한국인 대상 한국 최초의 유치원이라는 기념비적인 타이틀을 가지고 말이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일본인 대상 유치원만 있었다.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이화학당 4대 학장 프라이 선교사와 초대 원장 브라운 리 선교사가 16명의 원아들을 품고 한국 유아교육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진정한 유아교육 실현에 몸담은 이화부속유치원은 원아를 육성하는 것 외에도 전문 유치원 교사 양성소이기도 했다. 1915년 이화학당에 유아교육과가 생기면서 학생들의 실습기관을 역할도 톡톡히 해냈고, 1916년 개원한 중앙유치원에 파견돼,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며 기틀을 마련한 이들도 이화부속유치원(당시 정동유치원) 교사들이었다.

일제치하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이화부속유치원은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찾아 이동의 이동을 거듭했다. 호텔방에서 벗어나 1921년에는 정동(정동유치원)으로, 1936년에는 신촌(신촌유치원)으로 옮겼고, 드디어 1958년 6대 이순일 원장 때에 현재 원사에 터전을 마련했다.

한 세기 동안 대한민국 역사의 굴곡과 함께한 이화부속유치원의 이력에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간직돼 있다. 일제 말기에는 원아들이 일본 동요를 부르기도 했고, 담화시간에도 일본어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고초를 겪었다. 또 2차 세계대전 때는 폐쇄령이 떨어져 휴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전쟁 때는 부산 가교사에서 전쟁고아들을 품고 계속해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새해 벽두에 방문한 현 원사에도 이화부속유치원 100년의 유산이 스며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100년을 이어 전래되어온 기독교정신이 확연히 느껴졌다. 한국에 수십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치원들은 대부분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됐지만, 현재 그 설립배경과 이념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화부속유치원은 달랐다.

엄정애 원장은 “보통 유치원에서는 식사 때 기도하고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만 챙기는 정도다. 그러나 우리 유치원은 선교사들의 설립이념을 이어받아, 어린이 교육 전문 전도사를 모시고 아이들과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148명 원생 한 명 한 명에게 기독교교육과 연계한 지속적인 인성·성품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동안의 예배내용을 정리해 올해 1학기가 마칠 즈음에는 기독교교육을 주제로 한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2014년, 이화부속유치원은 바쁜 1년이 될 듯 싶다. 이미 1월 2일부터 100주년 행사준비에 돌입했다. 100주년 책자와 사진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으며, 오는 9월 27일에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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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공동체 운동 거점이 되다

선교·민족운동 주도…문화재 지정, 원형복원 추진 중

대구 교남YMCA회관   대구 중구의 근대골목은 지난해 ‘한국 관광의 별’과 ‘아시아 도시 경관상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도심에서 역사와 문화, 예술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흥미진진한 거리다. 대구근대골목을 투어하기 위한 국내외 관광객들로 늘 분주하다.

▲ 대구근대골목에 있는 대구YMCA 전신인 교남YMCA회관의 현재 모습이다. 한때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앞으로 원형복원사업을 통해 대구YMCA 역사와 대구3·1만세운동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것이 대구제일교회 구예배당이다.
이곳 대구근대골목을 걷노라면 대구·경북의 어머니 교회격인 대구제일교회의 옛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맞은편에는 대구YMCA 전신인 교남기독교청년회 회관이 있다. 교남YMCA 회관은 지난 191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미국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가 청년전도를 위해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구 예배당) 길 건너편에 건물을 지은 것이 바로 지금의 교남YMCA 회관이었다. 교남(嶠南)이란 ‘험준한 산이 많은 남쪽지방’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당시 사용했던 ‘영남(嶺南)’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대구YMCA 역사자료에 따르면, 교남YMCA는 1918년 9월 나라를 잃고 좌절에 빠진 지역의 청년들에게 영적 각성과 민족의식 제고라는 취지로 창설됐고, 이 이름은 해방 후 지금의 대구YMCA로 바뀌었다.

교남YMCA는 창립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이듬해 대구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 핵심지도자들이 대거 투옥돼 한동안 정체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들이 석방된 1921년부터 사회교육, 지역사회 봉사, 농촌계몽 등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이처럼 교남YMCA회관은 대구 3·1만세운동의 산실이자, 암울했던 시절 민족의 운명과 함께한 선교공동체·기독교사회운동체였다. 또한 물산장려운동과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폭넓은 기독교민족운동의 거점이 되어 주었다.

대구의 근대 역사와 문화, 기독교정신이 서려있는 교남YMCA회관이 한 때 철거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도심재생사업 일환으로 골목 정비와 회관 바로 안쪽 공간에 현재 공사 중인 에코한방웰빙체험관 건립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회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대구YMCA와 시민들의 움직임이 일어나 다행하게도 건물이 헐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현재 교남YMCA회관은 대구시문화재로 등록됐다. 앞으로 건물원형복원을 추진, 대구YMCA 역사관 및 대구 3·1만세운동 기념관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대구의 소중한 기독교 역사의 유산은 이렇게 지켜지게 되었다.

이제는 비록 문화재와 기념관의 모습이지만, 100년 전 이곳에서 왕성하게 행해졌던 기독청년들의 하나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상과 열정을 다시금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왠지 흥분되고,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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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순교역사 ‘큰 자랑’

15명 순교자 기념비 세우고 민족복음화 정신 일깨워

김제 만경교회   1914년 2월 1일은 만경교회(최병학 목사)의 설립일이다.
‘징기밍기(’김제만경‘의 사투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경은 김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큰 고을이었다. 군산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만나는 가장 큰 동네가 바로 만경이었으니, 복음을 싣고 항해하던 선교사들의 시선이 이 동네에 머물지 않았을 리가 없다.

▲ 100주년을 맞은 만경교회의 아픔이자 자랑인 15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순교기념비가 교회당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만경교회가 설립된 것은 순전히 내국인 성도들의 힘이었다. 이웃 묘라리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했던 곽영욱, 정화선씨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1913년의 일이고, 이듬해 2월 이들이 만경면 외서리에 다섯 칸짜리 예배당을 건축한 날이 바로 만경교회의 설립일이 되었다.

부위렴 선교사를 비롯해 최대진 김응규 곽진근 목사 등 한국기독교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초창기 만경교회의 부흥에 기초를 놓았다. 특히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만경교회는 한글교육에 힘쓰고, 유치원을 경영하며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설립된 지 37년째 되던 해 발발한 6·25는 만경교회에 상처와 영광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김종한 목사와 강성진 장로를 비롯한 15명의 순교자들이 한꺼번에 나오며 교회는 크게 휘청거렸고, 이후 20여 년간 담임목사를 모시지 못할 정도로 침체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김성업 이인수 임덕순 최상언 이찬희 목사가 이어 강단을 지키면서, 만경교회는 김제노회를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로 건실하게 성장했다. 특히 주일학교를 통해 젊은 세대에 대한 철저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진 덕분에, 이농현상에다 새만금 간척사업 등으로 지역경기가 극심한 불황에 빠진 현재까지도 탄탄한 규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인내의 역사, 순교의 역사는 만경교회의 가장 큰 자랑이다. 교회당 1층 한 칸은 오래된 역사사진들, 특히 순교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실로 알뜰하게 꾸며져 있고, 2009년에는 예배당 앞마당에 순교기념비가 세워졌다. 교회설립일인 2월 1일과 함께 순교기념일인 9월 27일은 만경교회 교우들에게는 그래서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100주년을 앞두고 만경교회는 수년 전부터 필리핀 선교사 파송, 옛 예배당과 선교원 리모델링, 역사전시실 보강 등 준비작업을 차근차근 벌여왔다. 설립기념일을 목전에 둔 요즘에는 전국에 흩어진 옛 교우들을 불러 모으는 일에 분주하다.

최병학 목사는 “뿌리 깊은 신앙의 연륜을 가진 성도들이 버티고 있어 어려운 지역환경에도 불구하고 잘 헤쳐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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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공동의 절기로 등장

각 교파 ‘11월 셋째 주일’로 합의…헌금 이웃 위해 쓰여

추수감사절 시작   1914년 한국 땅에 들어와 사역하던 각 교파 선교부의 회의에서 중대한 합의를 한다. 11월 셋째 주일 후 수요일을 추수감사절로 함께 지키기로 한 것이다. 추수감사절이 부활절이나 성탄절과 함께 한국교회 주요 절기로 등장한 결정적 계기이다.

▲ 추수감사절이 각 교파 회의를 거쳐 한국교회 공동의 절기로 부각된 것이 1914년의 일이다.
당초 한국교회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그 보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조 장로의 제안으로 장로교단에서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하고 실시한 것이다. 이후 몇 차례의 조정을 거쳐 현재는 대부분의 교회가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삼고 있다.

당초 11월 셋째 주일 후 수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한 것은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의 가을걷이가 대부분 10월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추수감사절의 본래 의미를 살리려면 날짜를 추석 무렵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추수감사절의 헌금은 처음에는 해외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이 헌금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제와 봉사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크게 늘고 있으며, 전도행사나 찬양제 등으로 ‘추수’ 혹은 ‘제사’의 의미를 살리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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