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남동구 논곡로 77번길 원룸촌 일대. 언뜻 보면 평범한 도시 골목 같지만 곳곳에 베트남, 러시아, 방글라데시 식당과 식료품점 간판이 보이고, 평일 낮임에도 동남아 사람으로 보이는 행인들이 쉽게 눈에 띈다. 원룸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 논곡로 77번길 일대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외국인들로 인해 작은 지구촌을 이루고 있다. 1883년 외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인천이 130년이 지난 지금 제2의 개항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천의 이러한 국제화 움직임은 기독교계에도 특별한 관심거리다. 2014년을 맞아 한국 기독교 전래의 흔적이 가득한 인천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선교의 도전을 제시한다.<편집자 주>


다문화 선교 ‘복음의 항구’로 다시 선다

‘코리아 드림’ 꿈꾸는 외국인 노동자 최근 10년 사이 급격히 늘어
지역교회도 다양한 사역 분주…체계적 지원·공감대 형성 시급

인천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인천항이 내다뵈는 도로변에 17미터 높이의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1986년 3월에 세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다. 기념탑이 세워진 곳은 과거 제물포항에 접한 곳으로,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이 처음 밟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념탑 아래로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청동상이 조각돼 있고, 청동상 아래로 아펜젤러 선교사의 기도문이 적혀 있어 찾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00주년기념탑 외에도 인천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내리교회,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내동성당, 존스 선교사 부인이 설립한 영화학당 등 많은 기독교 유적들이 있다. 인천은 그렇게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도드라지는 밀물의 땅이었다.

인천은 개신교 선교의 시작점 역할을 톡톡히 한 것과 마찬가지로 개항장답게 국제교류의 출발점이었다. 1883년 이후 일본인을 비롯해 중국 화교들이 집단 거주하기 시작했고, 근래에 들어서는 세계 각지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난 해 9월말 기준으로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4만 9634명으로 전국 7대 특별·광역시 중 서울 다음으로 가장 많다. 외국인들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남동공단, 주안공단, 부평산업단지 주변에는 동남아시아 등에서 온 저소득 노동자들이 많고, 송도국제도시와 영종지구 등에는 상대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 온 고소득 전문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남동구 논현동에서 10년 넘게 외국인 전문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안혜영 씨는 “10년 동안 외국인들이 급격히 늘었다”며 “논현동에만 해도 중국, 태국, 필리핀, 러시아, 베트남, 네팔,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중국과 교류 빈번

▲ 인천은 개항장이자 기독교 선교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인천제이교회 중국인예배 참석자들의 교제 장면,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 전경,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내리교회 초대 목회자들 동상(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인천에서 거주하는 외국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교(華僑)와 중국인이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주둔했는데, 이때 40명의 청나라 상인이 따라왔고, 이들이 한국에 머문 첫 화교였다. 이후 중구 북성동 일대에 청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많은 중국 산동성 상인들이 인천으로 건너오는 계기가 됐다. 현재 한국에는 1만 5000명 정도의 화교가 살고 있고, 이중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1000여 명이 등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교와 함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중국인 노동자와 조선족들의 유입도 증가했다. 자연스레 현재 인천에는 중국인교회를 비롯해 중국어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단체가 10여 곳에 달한다. 1993년부터 인천에서 외국인 전문사역을 해온 김교철 선교사(한남노회)는 “인천에 있는 배의 60%가 중국배라고 할 만큼 중국인들의 왕래가 빈번하다”며 인천에서 중국인들의 비중을 설명했다.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은 만큼 인천 기독교계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계산교회, 인천제이교회 등 교단 교회들은 물론 인천 시내 많은 대형교회들이 영어, 중국어 예배 등을 개설하거나 외국인들을 위한 별도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국제이주자선교포럼에 따르면 인천 내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선교 활동을 하는 교회와 단체는 3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선교 공감대 마련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국제화, 다문화화가 진행되고 있는 인천에서 외국인 사역은 아쉬움이 크다. 당장 외국인 사역을 하는 교회와 단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전체 4만 9634명의 외국인들 중 30여 개 교회와 단체가 100명씩을 감당한다 해도 4만 6000여 명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연합회 차원에서의 관심도 미미해, 인천기독교총연합회의 경우 외국인 사역과 관련해 이렇다 할 프로그램이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임원들이 바뀔 때마다 외국인 사역 노선이 달라진다고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관심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일관성 또한 없는 것이다. 외국인 사역의 선교 효율성이 탁월한 것을 감안했을 때 인천지역 3000여 교회들의 관심과 분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이다. 정노아 선교사(국제이주자선교포럼 총무)는 이와 관련해 “교회들이 외국인 다문화 사역을 선교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사역을 교회의 특별활동 중의 하나로 여겨서는 안 되며 또 다른 형태의 선교로 인식하고, 지원 역시 해외 선교에 걸맞게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 선교사는 덧붙여 “향후 보편적인 다문화 선교로 교회의 인식틀 자체를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02년 12월 121명의 한국인이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로 떠났다. 우리나라 첫 번째 공식 이민 기록이다. 이후 1905년까지 7000여 명이 제물포항을 거쳐 하와이로 떠났다. 1903년에는 내리교회에서 홍승하 선교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인천은 개항의 관문이기도 했지만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출구였고, 한국교회 선교의 새로운 출발선이었다. 인천이 ‘코리안 드림’을 ‘예수 드림’으로 변화시키는 선교 항구가 될지 기대와 관심이 모아진다. 개항 130주년을 보낸 인천을 새롭게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천아시아게임‘전도 전환점’ 삼는다


36억 아시아인의 스포츠 축제인 제17회 아시안게임이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에서는 열린다. 인천 기독교계는 45개국에서 선수 및 임원 2만여 명이 참가하고, 관광객이 30∼50만 명이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축제를 선교 기회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인천기독교총연합회,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인천성시화운동본부, 인천홀리클럽, 인천장로회총연합회 등 10여 개 단체들은 지난해 7월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기독인봉사협의회’(대표회장:최성규 목사)를 조직해 활동에 들어갔다. 협의회는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자발적인 봉사활동을 펼쳐 기독교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세계선교와 인천복음화의 계기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또 대다수의 무슬림이 아시아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안게임을 통한 무슬림의 확대를 최대한 경계하고, 스포츠 이벤트 때마다 교묘하게 접근하는 이단 세력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인다는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협의회는 자원봉사자 네트워크 구성 및 선수촌교회 사역, 국가별 자매결연과 응원, 선교본부 설치 등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국가별 자매결연에는 인천 시내 60여 교회가 동참했으며, 앞으로 더 추가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협의회 대표회장 최성규 목사는 “인천아시안게임은 둘도 없는 선교의 기회”라며 “모든 교회가 하나 돼 대회를 적극 지원하고, 인천과 한국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진심 담은 선교사역 중요”

유학생은 차세대 일꾼으로 성장 가능성 높아

국제유학생선교회 상임대표 김교철 선교사

“20년 전에는 외국인 근로자 선교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어요. 사역하는 곳도 몇 개 안됐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교회도 있었죠.”

김교철 선교사(한남노회)는 국내 외국인 선교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93년부터 인천 남동공단과 부평공단을 중심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고 예배를 드렸다. 인천외국인근로자선교협의회를 만들어 초대총무를 역임하고, 총회세계선교회(GMS) 국내외국인지부 초대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1998년 인천중화교회 청빙을 시작으로 수원, 대구중화교회에서 사역했으며, 2004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영어와 중국어권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

 

“한·중수교 후인 1993년부터 중국인 근로자들이 남동공단으로 들어왔죠. 공단 안에 있는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했어요.”

김 선교사는 인천으로 돌아온 후 근로자들 대신 대학 캠퍼스로 눈을 돌렸다. 똑같은 일을 경쟁적으로 하지 말고 다른 교회와 단체들이 안하는 일을 찾자는 생각이었다. 2008년 국제유학생선교회(ICM)를 만들어 캠퍼스를 돌며 유학생들, 특별히 중화교회 사역 경험을 살려 중국인 유학생들을 찾아다녔다. 지금은 인천대와 서울대 대학원생, 인하대와 숙명여대 대학생 등 30여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중국어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유학생들은 소수지만 배우려는 열정이 강하기 때문에 교육 효과가 커요. 한 번 깨달아지면 확실히 신앙에 귀의하기 때문에 차세대 선교 일꾼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죠.”

김 선교사는 특별히 외국인 선교에 있어 인천에 대한 애착이 크다. 알렌과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이 한국을 드나드는 통로였을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외국인 선교에서도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 선교사는 외국인 근로자 선교 20년을 보낸 인천 기독교계가 더 이상 외국인 선교를 특수 사역이 아니라 미래 한국교회가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할 사역임을 깨닫기를 권면했다. 덧붙여 김 선교사는 후배 사역자들을 향해 ‘진심을 담은 선교’를 주문했다.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변화시키겠다고 덤빌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여기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권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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