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은 마음껏 밥을 먹을 수 있었던 날”

한센인의 생일과도 같은 시간…말씀 듣고 위로하던 기억 여전히 남아
주민 660명 중 460명 5개 교회서 신앙생활… “심방전도사 파송했으면”


안개가 자욱했다. 새벽 미명에 서울을 출발하여 세 시간을 넘게 달렸건만 남도 끝자락 벌교와 고흥을 지날 때까지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입도하여 소록도가 고향이나 진배없다던 지인은 정오가 될 때까지 안개가 사라지지 않자, 넋두리처럼 한 마디 툭 던졌다.

▲ 소록대교가 완공되기 전, 소록도와 육지를 연결하던 녹동항 전경.
“허허,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안개가 왜 이리도 짙게 깔렸담. 아직도 소록도는 걷히지 않은 세상 같당게.”

소록도 가는 길은 언제나 아련한 회한이 짓누른다. 기쁘고 반갑게 찾아간다고 하지만, 먼 타국을 방문하는 것 마냥 쉬 살갑게 다가서지 못한다. 이런 느낌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고흥반도 끄트머리 녹동항에서 소리치면 들릴 것 같은 소록도는 2009년 육지와 연결하는 소록대교가 완공된 이후,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환자들이 생활하는 곳 빼고는 이제 일반인의 출입도 자유롭다. 1910년 선교사들에 의해 시립 나요양원으로 출발하여 1916년 조선총독부령에 의거,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개원한 현 국립소록도병원은 섬 전체가 울창한 산림과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으로서 최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피폐한 영혼에 희망이었던 ‘생명수’

 면적 3.79㎢, 해안선 길이 12㎞에 이르는 이곳에 정작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동리 곳곳마다 예외 없이 교회가 서 있다는 것이다. 소록도병원이 한센인 환자를 육체적으로 치유하는 재활의 센터였다면, 교회는 이들의 피폐해진 영혼에 새 삶을 심어주는 생명수 역할을 돈독히 해 왔다.

▲ 소록도 교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고, 영혼을 살찌우는 수원(水源) 역할을 해 왔다. 소록도 교인 또한 신앙심이 유난히 깊다. 한센인들이 손수 바다의 모래를 퍼다가 지은 중앙교회.
원래 소록도에는 8개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3개 교회가 폐교되고 지금은 중앙 신성 동성 남성 북성교회 등 5개 교회가 한센인들의 안식처로서 자리를 굳게 하고 있다. 특히 성탄절은 예수님만의 탄생일이 아니라 이들에게도 생일이나 다름없었다.

▲ 초창기 소록도병원.
“하루에 3~4홉도 안되는 보리쌀을 배급받아 늘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성탄절은 마음껏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저녁에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고 새벽에 마을 집집을 돌며 새벽송을 부르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6살 젊은 청년기에 소록도에 들어와 머물렀던 정상권 장로(암사제일교회)는 먹는 즐거움에 말씀을 듣고 서로를 위로하던 소록도의 성탄절과 교회 얘길 꺼내다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소록도 이야기를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박정수 장로(방주교회) 또한 소록도에서 알게 된 예수를 통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오로지 은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흐르는 진물을 깨끗이 닦고 손톱과 발톱을 다 깎아 드린 뒤, 거동을 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업고 교회에 갔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은혜의 도가니였죠.”

이들에게 소록도 교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고, 영혼을 살찌게 만드는 수원(水源)인 셈이었다. 그래서 같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여느 사람과 달리 신앙심이 깊다.

한 때, 6000명에 이르던 소록도 인구는 현재 정착촌 주민 660명 뿐이며, 이중 70%에 이르는 460명이 5개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남아있는 주민들 또한 대다수가 노인들로서 평균 나이가 75세를 넘어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병이 낫거나 생활이 안정되어 육지로 나갔던 옛 주민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어 어느 정도 터전이 유지되고 있다지만, 소록도는 여전히 외로운 곳으로 남아있다.

★말벗이 되어줄 봉사자 필요

 현재 소록도에 머물고 있는 주민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치료가 목적인 환자보다도 수족이 불편한 장기요양자들이 더 많다. 환자들 또한 광주나 순천 그리고 여수 등지로 위탁치료를 다니는 이들이 많아 이들의 말벗이 되어줄 봉사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성탄절을 앞두고 소록도중앙교회 성도들이 예배 드리는 모습.
“한센인들에게 물질보다는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들과 격의없이 대하고 더불어 함께 한다는 의식이 복지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석원 목사(한센인선교복지위원장)는 총회가 말로만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진실된 행동으로 소록도와 같은 곳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록도 교회는 성탄절을 앞두고 분주하다. 성탄의 불을 밝히는 트리도 교회에 세웠고, 비록 내세울 것은 없지만, 찬양발표회도 준비 중에 있다. 성탄절 예배에는 장기 근속자 표창도 시상할 계획이다. 소록도연합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선호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소록도를 특수 사역지로 생각하여 성탄 선물로 총회에서 심방전도사를 파송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울로 귀경하는데 오전과 달리 안개가 말끔히 걷혀 있었다. 내일은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올해 성탄절에는 흰 눈이 펄펄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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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토하듯 기도, 기도했어요”

모든 것 바친 한센인 복지에 평생 헌신할 터

한센인 인권보호 앞장서는 정상권 장로


“큼지막한 소나무를 베어다가 교회 앞마당에 개선문처럼 세우고, 솔방울로 트리를 장식한 것이 기억납니다. 학생 청년 어른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축제를 벌이는 ‘해방일’이 성탄절이었죠.”

정상권 장로(암사제일교회)는 영양이 보충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를 골아가며 치료만 받다가 모처럼 돼지고기와 닭고기의 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성탄절이었다며, 그날은 영육이 풍성히 살찌는 매우 ‘기쁜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평소 주일에도 예배당은 만원이었지만 성탄절에는 앞뒤 좌우 간격을 벌릴 틈도 없이 판자바닥에 교인들이 무릎을 꿇고 입구까지 꽉 들어차 1300명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소록도중앙교회의 경우, 새벽예배가 끝나면 한센인 교인들이 스스로 바다에서 모래를 퍼다가 벽돌을 굽고 밤 10시까지 산 허리를 깎아 교회를 지었다면서, 당시 소록도 교인의 신앙 열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모든 걸 교회에 바치고도 부족하여 여성도들이 머리를 깎아 헌금을 드린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적인 추억이라고 밝혔다.

“60년대 초반 소록도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은 전체인구 4300명 중 3000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매일 정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밤에도 교회에 나와서 피를 토하듯 소리내어 그렇게 한센인들은 기도했습니다.”

정 장로는 한센병이 깨끗이 나아 소록도에서 퇴소한 뒤, 남원에서 정착하며 닭장을 짓고 돼지 움막을 치며 자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한성협동회 상무이사로 일하면서 한센인 병력자들에게 ‘사람다운 삶을 살자’는 자정운동을 펼치며 한센인 인권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당시 한센인 병력자들은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 도둑질을 하거나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것이 일쑤였습니다. 아편·알콜 중독자도 허다했습니다.”

정 장로는 이들에게 자랑스런 부모가 되어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을 남겨주지 말자고 설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호소하고 다녔다고 한다. 물론 영적인 부분을 강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취지를 살려 정 장로는 세계한센인협회(IDEA)를 설립하여 세계에 58개 교회를 세우고 한센인 주택 40동을 짓기도 했다. 정 장로는 현재 IDEA 회장을 맡고 있다.

“총회가 문둥병 나병으로 부르지 않고 한센인으로 용어를 채택한 점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한센인들에 대해 교회나 사회가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 장로는 지금도 그렇지만 늘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한다며, 한센병 퇴치와 한센인들의 복지를 위해 평생 헌신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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