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제10차 부산총회, 기존입장을 확언하며 종교다원주의를 심화


논란이 많았던 WCC 제10차 총회가 끝났다. 본래 이 총회는 다마스쿠스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시리아 국내의 정치사정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부산으로 이첩되었다.

그만큼 급조된 성격이 없지 않았으며 별 이슈도 없이, 그동안 준비했던 몇몇 문건들만 확인하고 소란한 극을 마쳤다. 줄곧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동성연애를 인정하는 입장을 공식적인 문건으로 채택하느냐 마느냐 하는 정도의 문제였다. 우리는 WCC의 대다수 회원이 이에 대한 찬성의 의견을 표명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미 예견되었던 바와 같이 WCC를 유치한 한국준비위원회 측의 내분도 시종 만만치 않았다. 한국준비위원회 측은 머리는 진보적인 사상을 담고 손발은 보수주의를 흉내 내는데 급급했다. 이번 부산총회는 생명과 평화와 일치를 내세우고 남북한의 화해를 도모한다고 줄곧 선전했지만 북한의 정치적인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일종의 이념적인 입장만 천명했을 뿐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WCC가 서있는 자리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WCC 부산총회는 처음부터 대안(代案)총회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이를 주최한 측은 본질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채 우왕좌왕하며 막대한 물량을 쏟아 부은 회의장 밖의 행사를 알리기에만 분주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접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는 WCC의 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20세기 중후반을 통하여 WCC가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첨예하게 표출되었던 동서(東西)간의 이념갈등과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표출되었던 민족 분쟁과 인종 분쟁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으로 해결해 보고자 했던 종교적인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러한 요구가 사라진 지금 WCC는 문화적이거나 환경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며 존립의 의의와 가치를 내세우나 별로 호소력이 없음을 이번 총회를 통하여 보여준 것이다.

WCC 부산총회가 채택한 “하나님의 선물과 일치로의 부르심—그리고 우리의 헌신”과 여러 보고서들을 통하여서 우리는 10차 부산총회가 그동안 WCC가 견지해 온 입장을 더욱 노골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것은 이번 총회가 종교다원주의적인 WCC의 입장을 분명히 개진했다는 점이다. 이번에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의 비전을 향하여”라는 문건에서 WCC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외시하고 선교의 본질이 다른 종교들에 대한 다양한 종교 경험 가운데 범세계적인 친교를 이루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범적인 선교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을 뿐 그 자신이 유일한 복음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이번 총회를 통하여서 WCC는 성경의 진리는 차치하고 “타종교 안에 있는 진리의 선함의 요소”를 더욱 자주 입에 올렸다.

그들은 성경이 유일한 복음의 진리 즉 계시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복음에 이르는 “원천적인 자료”에 불과하다는 그동안의 입장을 다시 확인하였다. WCC는 신앙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고 단지 그것은 “합의적 신뢰”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사실상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외면한 것이다.

둘째, 이번 총회를 통하여서 WCC는 로마 가톨릭과의 협력과 일치를 더욱 진일보시켰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 간 신구교공동사업기구,” “타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의 증언,” “함께 생명을 향하여” 등의 문건을 통하여서 WCC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수위권(首位權)을 소개하며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지 않으므로 사실상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조장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종교다원주의에 우호적인 WCC의 최근 경향이 로마 가톨릭의 노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WCC가 다루고 있는 첨예한 신학적 논제들의 배후에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주도적인 관여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셋째, 우리가 이번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선교와 전도위원회의 “함께 생명을 향하여”라는 문건에서 보듯이 WCC는 보혜사 성령을 성도들의 생명이 되는 구원의 영으로 보지 않고 단지 “세상을 하나로 묶는 창조의 영”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이번에 WCC는 선교를 보편적인 인류의 격을 높이는 창조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점을 더욱 노골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인류애를 고양하기 위한 “투쟁과 저항으로서의 선교”를 말하기도 하였다. WCC가 말하는 “생명의 잔치”에는 성경적 구속(救贖) 개념이 없다.

이번에 채택된 “모두의 생명, 진리, 평화를 위한 경제: 행동 촉구 요청”이라는 문건에서 “생명경제”라는 말을 만들어 “온 피조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천명한 것도 이를 입증한다. 이는 WCC가 교회가 아니라 인류의 일치를 추구하는 세속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WCC는 세속적 친교에 기독교적 의미를 덧칠하려고 할 뿐 진정한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넷째, 이번 부산총회에서 WCC는 진리를 묻지 않고 가시적이며 기구적인 연합과 일치만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그들은 성도의 교제는 불문하고 “창조세계의 교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상은 인간과 모든 창조를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있는 친교 속으로 모으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진리며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그리스도가 보여준 아량으로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자고 외치는 WCC의 저의를 뚜렷이 보여주는 논거가 된다.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외치지만 사실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이다. WCC가 교회의 본질로 여기는 “공동체적 친교”에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남과 교통만이 있을 뿐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구원의 생명의 역사가 없다. 그러므로 WCC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커녕 교회의 존립 자체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10차 WCC 부산총회를 통하여 우리는 그동안 주장해온 왜 우리가 WCC를 반대하는지에 대한 명분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켜 주셨다. 이번에 우리는 WCC로부터 영구탈퇴하고 WCC에 대한 참여뿐만 아니라 어떤 협력도 거부하는 교단 총회의 결의가 얼마나 적합한지를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WCC를 주최한 측에서조차 일각에서는 WCC가 얼마나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는 단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는 자조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우리 교단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선도적으로 이에 대한 일사불란한 대응을 해왔다.

수회 WCC를 비판하는 심도 있는 책을 출판하였으며 교단의 총합된 뜻을 여러 차례 선언문과 세미나 등을 통하여 표출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교단 내에 어떤 교회나 목회자도 이에 참여하거나 협조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WCC를 주최하는 측으로부터 여러 교회와 성도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WCC를 진리 문제며 생명 문제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타협도 불허한다. 진리가 아닌 것과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진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여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하나 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WCC는 WCC가 추구하는 근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여하를 묻지 않는다고 공언해왔다. 주도 하나며 성령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일진대, 어찌 진리를 불문(不問)하는 연합과 일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채택된 “신학교육에 대한 에큐메니칼 서약”에서 WCC가 천명한 다음 말은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

“신학교육은 본질적으로 모든 기독교 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에큐메니칼 과업이다. 다른 교파 전통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신학교육 커리큘럼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위반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교단적 분열을 장기화한다.”

이러한 적반하장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어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난도질하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정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일말의 신념이라도 있다면 WCC는 우선적으로 WCC 자체부터 해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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