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섣부른 잔치’ 아닌 ‘역사적 회개’가 필요하다

문제 핵심은 WCC 신학…성경 진리보다 가시적 일치 집착하는 태도 반드시 수정돼야
바른 교리에 서 있지 않은 에큐메니칼운동은 장애물…분열 행보 즉각 중지·사죄하라


▲ 문병호 교수
1.WCC의 이중적 횡보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명목으로 성경의 진리조차도 하나의 타협거리 정도로 여긴다. 그들은 정통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을 멀리하고 자유주의 세속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여러모로 표방하고 구현해 왔다.

WCC 문제는 일차적으로 진리의 문제이다. 곧 교회가 바로 서느냐 넘어지느냐의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WCC의 신학에 있다. WCC는 소위 근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수행한다는 미명하에 진리를 묻지 않고 무차별적인 기구적, 조직적 교회 연합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무분별한 성경비평을 일삼고, 세속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원천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우리가 WCC에 대한 경각심을 드높이고 이를 적극 반대하는 이유는 이 행사가 성경무오(聖經無誤)를 믿고 참 교리에 서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을 미혹하여 이성주의, 세속주의, 다원주의에 물들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왜냐하면 거짓 교훈은 누룩과 같이 속히 번져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마 16:6).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는 보수적인 교단들과 성도들은 부산총회를 반대하는 입장을 누누이 천명해 왔다. 우리는 WCC의 총회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WCC 자체를 성경적인 단체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WCC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횡보를 즉각 중지하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교회의 분열과 성도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을 이제 그만 그쳐야 할 것이다. 그들이 먼저 할 일은 한국교회 분열에 대한 역사적 회개이지, 섣부른 잔칫집 초대가 아니다.
 

2. “다른 복음”도 “복음적”이라고 끌어안는 WCC

WCC는 성경을 전통(傳統) 혹은 전통화(傳統化)의 산물로 본다. 성경은 교회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서 상대적인 권위만 가질 뿐이므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 66권만을 정경(正經)으로 보는 데에도 부정적이다.

WCC는 “에큐메니칼 성경해석학”을 주창하면서, 성경기록을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그리고 성경을 그 해석학적 작업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치는 해석자의 수준과 체험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의 상황적 의미를 그들은 “전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오직 전통의 형태로만 작용한다.

WCC에 있어서, 성경은 여전히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는 미완성·미해결의 책이다. 그들에게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도, 그것으로부터 나온 보편적 교리도 없다. 그들은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또한 성경에는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완전한 구원교리가 담겨있다는 사실(딤후 3:16; 계 22:18~19)을 인정하지 않는다.

WCC의 입장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성부는 사랑의 하나님, 성자는 은혜의 하나님, 성령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각각의 위격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된다. WCC에 의하면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은 부인되고 서로 간의 관계만 남게 된다.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 즉 조직적이며 기구적인 교회에만 제한된다.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토대를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성도 서로간의 가시적 친교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의 비밀을 아예 제거해 버렸다(엡 5:3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소망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몸”이라고 정의하는데 더 익숙하다(엡 4:12).

WCC 신학의 모호성은 성례에서 극에 달한다. 그들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표징-물 혹은 씻음-이 제시하는 의미를 “성(性)이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의 장벽이 극복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의 해방”에서 찾는다. 그들이 세례를 “문화화”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또한 WCC는 성찬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오류에 빠져있다. 이러한 오류 역시 성찬을 통하여 가시적인 교제를 강조하는데 기인한다.  WCC가 말하는 “성찬적 사건”은 “에큐메니칼 사건”을 뜻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찬의 핵심적 가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총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그 표징이 떡과 잔일 필요가 없으며, 굳이 그 의미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WCC의 입장을 ‘성례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의 길: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요 17:21). WCC는 교회의 본질을 사람의 교제에서 찾는다. 서로 모여서 하나가 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의 여하함은 묻지 않는다.

WCC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성도의 교제보다 WCC를 축으로 삼는 교회의 가시적·조직적·기구적 연합과 일치를 추구한다. 그들은 이를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궁극적 목적은 “협의회적 공동체(conciliar community)”를 형성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 WCC가 머리가 되는 기구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적은 WCC에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는데 있다.

WCC의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종교다원주의가 필히 따르게 된다. 1990년에 작성된 <바르 선언문>에서 WCC는 창조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일반은총이 보편적이듯이 구원의 은총도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시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승화될 때 그 가치가 구현된다고 말한다. 즉 십자가는 구원의 유일한 한 길이 아니라 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WCC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도 그들이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 개념은 그저 명칭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어도 하나님이 하시기만 하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활동을 통하여서 선교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선교의 인간화(humanization)”를 추구한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국내 민중신학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4. 비성경적, 반교리적 경향의 심화: WCC 부산총회 전망

WCC는 그 태동에 있어서부터 동방의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이에 영국의 성공회가 더하여지고 성경비평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종하던 유럽의 루터란들과 개혁교단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던 미국의 일부 교단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다. WCC의 외연이 획기적으로 확장된 것은 옛 소련과 동구 공산권 교회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속한 군소교단들 그리고 다수의 오순절 교회들이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WCC는 특정 교단의 권익을 성경적 진리보다 앞세우고, 공산권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제3세계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폭력이라도 불사하는 등 세속적인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WCC는 기본적인 조항에 대한 형식적인 고백만 있으면 실제적인 교리의 차이가 있더라도 어떤 교단이라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각 교회가 교리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극단적인 세속주의, 다원주의, 심지어 신은 죽었다는 사신신학(死神神學)을 좇더라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 어떻게 믿는지는 거론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진리가 기준이 되지 못하고 정치적인 논리나 세속적인 가치가 전면에 부각된다.

진리가 다르고 성경의 가르침에 바로 서있지 않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무분별하게 모이기만 힘쓰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수단이 될 뿐이다. WCC야말로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자격을 갖추지도 않은, 진리에 서 있지 않은 연합과 일치를 기뻐하시겠는가?

WCC를 준비하고 있는 유치측의 최근 횡보를 보면 가히 의아스러움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들은 실상은 감춘 채, 전혀 비본질적인 행사들을 과대 홍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총회에서 다루어질 민감한 의제들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그저 역대 개최지를 순회하며 땅이나 밟고, 통일열차를 운행한답시고 분주하며, 마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잔칫집 흉내만 내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식전행사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 WCC 총회가 다룰 의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다만 이러한 점에 비추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동안 있었던 역대 총회들의 흐름과 최근의 몇몇 준비 문건을 고려할 때 부산총회는 이전의 어느 총회에서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정통 교리에서 더욱 멀리 일탈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WCC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지만 교회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고 세속적이고 기구적인 활동을 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WCC에 참여하거나 WCC를 돕는 것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고 할 것이다. 빛과 어두움, 의와 불법,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시거든(요 14:17), 이방의 습속을 행하며 초혼제를 벌이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믿고 아는 자라고 할 것인가(요 17:3)? 어찌 그곳에 모인 자들을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인가(롬 8:9; 행 11:26)?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진리 가운데로만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거늘(요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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