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직 고위 관료들의 옥중 모습. 왼쪽에 가슴이 쇠사슬로 묶인 이가 이승만이고 앞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상재 선생이다. 독립협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이들 전직 고위관료들은 정치적인 야망의 좌절로 감방에서 낙심해 있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반입해준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중생의 체험을 거쳐 기독교인이 되었다. 출옥 후에 이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기독교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출처:정동제일교회 역사 화보집)
이상재(李商在 1850.10.26~1917.2.29)는 독립운동가, YMCA운동가로 호는 월남(月南)이며 자는 계호(季浩)이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승지 박정양(朴定陽)의 문객으로 있다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개화상을 시찰하였다.

1884년 우정국 주사를 지냈고 1887년 6월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1등 서기관으로 도미하였다. 1892년에 귀국하여 전환국위원, 외국어학교 교장 및 여러 관직을 거쳐 내각 총서 중추원 1등 의관, 의정부 총무국장 등 고위관직을 지냈다.

1896년 7월에는 서재필,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개화파 정객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02년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수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이승만, 신흥우, 이원긍 등 정치범들과 함께 기독교적인 분위기의 감옥생활을 경험했다. 성경 등 기독교 서적의 탐독, 옥중학교의 운영 과정에서 개종을 결심했다.

출옥 후 YMCA 활동에 몰두하여 YMCA 종교부 총무를 거쳐 1911년에는 YMCA 총무에 취임했다. 3·1운동 당시에는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고 조선 YMCA 연합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회장 등에 각각 취임, 언론 및 사회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탁월한 지조와 인격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대표적 기독교 민족운동가로 손꼽힌다. (기독사전)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구령사업, 교육, 문화, 경제, 의료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공로가 참으로 지대하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