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섭 교수(총신대·교회사)

 
교회의 ‘가시적 일치’에 집착, 본질 뒤바꾸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이고 신비적 연합’ 간과, 진리와 교회 공동체 순결성 수호못해
복음이 내포하는 사회적책임 배타적으로 강조, 교회를 정치적 압력 단체로 전락시켜

 

▲ 안인섭 교수
역사적으로 교회는 진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양자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존재해 왔다. 그런데 근래 한국에서는 교회 연합 운동인 WCC에 의해서 진리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본 기고는 1948년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 이후 발전해 온 WCC의 교회론의 신학적 특징들을 분석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으로 비판적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선후가 전도된 교회의 본질: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아닌 가시적인 일치를 목표함

WCC는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교회들의 협의회(a council of churches)요 그리스도안에서의 일치를 표현하는 교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WCC는 하나의 사도적인 신앙과 세례와 성만찬을 공유하고 있는 “협의회적 교제” 안에서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the visible unity of the church)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근거하며, 그 결과로 성도들의 연합이 뒤따른다. 교회 연합의 본질적인 속성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몸 되는 그의 성도들과의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교회론의 가장 근원적인 내용을 결여한 채, WCC는 교회의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일치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선후가 전도된” 교회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선교에 기초한 성만찬론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완성된 BEM문서(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의 약자를 따서 BEM으로 불리움)는 WCC의 성만찬론을 가시적인 교회의 일치와 관계시키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라고 밝히고 있다. WCC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후컨데이크(J.C. Hoekendijk)에 의해서 주창되었던 성만찬의 종말론적인 관점을 도입했다. WCC는 성만찬을 ‘세상’ 안에서 왕국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성찬을 순수하게 교회론적인 사건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WCC의 BEM문서는 성찬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라고 확대 해석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WCC의 신학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WCC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실체와 상징의 구별 없이 강조함으로 인해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던 그리스도의 계속적 희생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WCC의 성만찬론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벗어났으며, 사회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는데, 그 근저에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사회 구원적인 선교관

1961년 WCC 뉴델리 총회에서 IMC(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WCC와 통합되면서 WCC 산하 세계 선교 및 전도국(The Divi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이 되었고 이것이 WCC의 선교관을 규정하게 되었다. 1968년 WCC 제5차 웁살라 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그 절정에 달하여 선교는 불의와 가난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무렵에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의 등장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1972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방향은 불의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이 놓여졌다. WCC의 이런 선교관과 사회관은 1980년 멜버른 선교대회로 이어져 선교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참여로 진술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혁된 WCC의 선교관을 대변한다고 하는 중요한 문서인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1982년) 이후에도 WCC 선교관은 여전히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선교관과 사회관과는 거리가 멀며, 사회 구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1960~70년대 이후 WCC의 선교관은 해방신학적인 맥락으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인 선교관과는 다른 관점이다.


4. 정치학적인 행위로 전락한 교회의 복음 선포

WCC에 의하면 예수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들이며,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WCC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린당하고 무시당한 모든 사람들과 연대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에 불과하다. WCC에 의하면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물질적인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이다.

과거 보수적인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신학적 이해를 깊게 하지 못했던 면은 물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가난한 계급만을 위한 그리스도로 만들었다.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책임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다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복음 선포를 이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과 범위를 제한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WCC는 교회를 그 본질에서 이탈하여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전락시켰다는 화란 캄펜신학대학교의 신학자 클라스 루니아 교수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다. WCC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복음 선포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고 있다. 사회 정의를 위한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사회 불의를 일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간화로 대치시켜 버림으로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말았다.

 
5. 타 종교에 대한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

인간에게는 종교의 씨앗이 있어서 절대자를 향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향하는 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어떤 대상, 즉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WCC는 교회가 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종교간의 대화와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WCC는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다양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가는 것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WCC 교회의 선교는 결국 종교간의 대화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나오는 글: 새로운 패러다임의 개혁주의 연대의 긴요성

WCC의 교회 일치는 성경적인 진리와 역사적인 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 지지 못했다. WCC는 교회의 본질을 가시적인 일치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그보다 전제되어야 할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이 되는 교회와의 영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이 간과되고 말았다. 이것은 선후가 전도된 일치일 뿐이다. 교회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를 담지하고 또 그것을 보호해야 하는데, WCC는 교회의 일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진리와 교회 공동체의 순결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 못했다. 또한 WCC에서 말하는 복음 선포는 지나치게 사회적-정치적 차원에 경도되어 있어서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교회의 선교 개념과 달랐다. 결국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의 진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명제는 역사적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머리 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교회가 세상에서 복음 선포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명제이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개혁신학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연합 운동의 필연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WCC 교회론을 비판하는 글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며 역사적 개혁주의의 신학적 유산을 공유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뿐 아니라, 기독인 학자 및 기독 전문인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연대 운동이 현 시점에서 절실히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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