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기 장로(전 공군참모총장)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개입하시다


▲ 김은기 장로는 당시 공군사관학교 법당이었던(현재에도 서울 보라매 공원에 있는) 성무 호국사에서 K스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김 장로가 결혼식 후 하객들과 인사하는 모습.
출가하여 스님이 될 마음을 가지고, 출가할 시기를 엿보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내가 3대 독자로써, 출가하여 나 하나 잘 되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 집의 대(代)가 끊기게 되니 이건 조상에 대한 불효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중 불교에는 윤회사상(사람이 죽어도 거듭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이 있으니 금생(今生)에는 재가(在家) 신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내생(來生)에 스님이 되는 것으로 결심을 바꾸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이 일은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제 삶에 개입하여 주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내생(來生)에 스님이 되기로 작정을 한 뒤로는 생도 생활에 전념하여 공부도 열심히 하고 비행훈련도 열심히 받아 마침내 1974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비행훈련도 잘 마치고 전투 조종사로서의 생활을 광주 전투 비행단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1976년 말 저는 중등 비행훈련과정 교관 조종사로 차출되어 사천 훈련비행단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제가 사관생도 1학년 겨울방학 때 수계식을 집전하셨던 범어사 K 큰 스님의 주례로 사관학교에 있는 성무호국사에서 불교 예식에 따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사천에 있는 동안 나는 성실한 불교신도로써 불교인 조종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다른 종교의 조종학생들에게 포교도 하였습니다.

결혼 후 거의 3년을 사천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 기간 중 저는 두 아들을 얻었고, 1980년 봄에 교관 임기를 마친 저는 가족과 함께 수원 전투 비행단으로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수원으로 이동한 후 서북지역 최일선 전투 비행단에서 전투 조종사로써 성실하게 영공수호 임무를 감당하고 있던 1980년, 국방부에서 국가 시책으로 장교들을 미국에 위탁교육을 보내는 계획을 시행하게 됨에 따라 공군에서도 이때부터 조종사들에게 석사, 박사과정 위탁교육을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한 기수에 4~5명 정도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저도 1982년에 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몬트레이에 위치하고 있는 해군대학원(U. S. Naval postgraduate School)의 무기체계 석사과정에 입학하였습니다. 유학 당시 저희 아이들의 나이가 5살, 4살이었는데 한참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상태라서 다소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일찍이 외국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고 영어도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좋으나 이들이 미국에서 계속 살 것이 아니라 2년 반 후에는 귀국해서 한국아이들과 경쟁하고, 또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데 언어 기능이 막 발달할 시점에 미국에 온 것이 저들에게 혼란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인 이민 교회가 주말에 한글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부부는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아이들은 교회 한글학교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이 연유가 되어 다음에는 제 아내가 저에게 함께 교회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세례식을 하는 날 축하해 주기 위하여, 모든 것이 생소해서 부자연스럽기는 했지만, 아무튼 교회당 안으로 발을 처음으로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지한 자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제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저에게 역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교회에서 수련회를 부부동반으로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나만 혼자 가게 되서 그러는데, 혹시 함께 가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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