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만 교수(대신대 신약학)

 
‘하나님의 선교’ 이름 아래 사회운동으로 변화

1952년 호켄다이크에 의해 시작… ‘샬롬’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선교관 강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증거’ 우선…복음과 사회개혁 동일시하는 입장 바꿔야

 

▲ 박윤만 교수
1.WCC 선교관:‘하나님의 선교’

WCC의 선교관은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로 대변된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1952년 독일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회의 주제 강연을 맡은 화란의 선교학자 호켄다이크(J.C. Hoekendijk)는 선교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냄 받은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선교관에 문제를 제기한 후,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을 선교의 주체로 보고 교회는 그 선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핵심이라 주장했다. 호켄다이크에 따르면 하나님은 교회 안팎에서 ‘구원’를 이루어 나가신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을 ‘샬롬’으로 간주한 후, ‘샬롬’을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라 주장한다. 하나님의 이런 ‘샬롬’ 사역은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선교사역의 주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다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세상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 여러 도구들 중 하나로 쓰임 받을 뿐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빌링겐 선교대회에서 일어난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는 형식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교를 그리스도의 교회와 상관없이 사회적 활동과 동일시 하게 되는 인본주의적 선교관의 길을 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여러 발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빌링겐 선교대회 이후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된다. 1963년 12월 8일~19일 열린 멕시코 대회는 WCC의 선교관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름 하에서 사회운동의 성격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열린 제4차 WCC의 웁살라 대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대회에서 선교는 인간화(humanization)로 이해되었고, 하나님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예를 들면, 건강과 사회봉사, 청소년을 위한 활동,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이 하는 일, 도시갱생 프로그램, 인권옹호 등)이 선교라고 이해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에 어떤 구별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이 대회에서 거론될 수 없었다. 다만 교회는 선교의 목표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성을 지적하고 그 인간성을 다른 인류에게 심는 것을 그것의 임무로 이해해야했다. 보쉬(David Bosch)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 당시 에큐메니칼 진영이 인간과 역사에 대해 얼마나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회였다. 즉 역사와 인간 안에 내재한 악과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어떤 언급이 없이 단지 사회 정치적 활동을 계획하면 어떠한 계획이든지 성공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 만들어낸 선교이해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이후 1983년 캐나다 벤쿠버 대회가 열리기 직전 1982년 7월 WCC 중앙위원회에서 ‘선교와 전도: 에큐네니칼 선언’ 이름으로 공포된 문서의 두 번째 주제, ‘삶의 모든 영역을 향한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회개를 뛰어 넘어 사회구조적 변혁으로 가야 함을 밝히고 있다. 만일 한 개인의 회심이 바른 것이라면 그 회심은 사회구조악의 변화에 헌신함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 문서는 그러한 사회운동은 회심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회심자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구조적 변화를 구원으로 보는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WCC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으로 온 교단들이 함께 한 연합회라는 태생적 성격으로 인해 선교관에서 혼합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된 선교관은 호켄다이크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 즉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악들에서 사람을 해방시켜 봉사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을 그 뼈대로 삼고 있다. 이러한 WCC의 선교관은 성경 보다는 현대 사회문화와 인본주의적 철학을 그 토대로 삼으면서 발전된 관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삶의 모든 규범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여기고 있는 이라면 성경에 뿌리를 둔 선교관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3.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선교’의 두 가지 문제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도록 하는가? 두 가지가 밝혀져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지만 한 인간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책임 있는 회심에 대해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 웁살라 대회로부터 나온 문서는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은 누구나 각각 새 인류의 한 식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하신 일방적인 화해 선언을 세상이 맛보게 하고 그 샬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을 선교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러한 선교관에 따르면 교회의 주된 임무는 이미 세계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가 따르고 있는 성경적 선교관은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복음전파로서 선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사회개혁과 정치적 불의 그리고 모순적인 경제 제도를 고쳐나가는 일 그 자체를 복음전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는 앞뒤가 바뀐 사역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신 중보자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회심을 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이끌기 보다는 여전히 사탄과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모양새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선교현장에서 복음전파와 사회복지 실현 중 어느 것이 우선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이 복음전파와 선교에 대해 가르치는바 자체가 바뀔 수는 없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도록 하는 사역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주장하는 사회개혁과 정치적 프로젝트는 복음전파의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관의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기 위해 하신 싸움이 온 세상을 부패로 이끄는 죄 즉 사탄과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는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회개혁가의 모델로 이해되며, 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죄는 압박과 착취 불평등 가난 기아와 그것을 일으키는 사회 구조적 모순과 동일시되어 버린다.

성경적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고 선포하신 예수께서 싸우신 대상이 불평등과 가난 그리고 기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져온 더 근본적인 원인 즉 죄였다는 것(막 3:20-30; 히 2:14)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주되심의 고백이 모든 사회적 프로그램과 복지(사회선교)를 가능케 하는 근본이라는 믿음은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초위에 올려놓으려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핵심임이 분명하다.


4.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교’의 공헌은 있다. 선교의 주체를 삼위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성부 하나님, 그 피조물을 재창조/구속하시고자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승천하시어 성부 하나님 우편에서 성자를 통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오늘도 선교는 진행된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사실 교회는 선교명령을 받은 교회 자신이 영혼을 구원하고 있다는 오만한 태도를 가진  것이 사실이며, 또 선교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삼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관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이는 바로 삼위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교회가 눈을 돌리도록 하여 선교를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고 정반대의 길로 갔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인간과 사회 프로젝트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사회, 정치적 자유로 흡수시켜 버린 것이다. 앞뒤가 바뀐 그와 같은 구원관은 삼위 하나님 중심에서 출발한 WCC의 선교를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끝을 맺도록 해버렸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바 복음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은 복음을 십자가에 죽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주로 등극하셨다는 사실로, 복음전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증거사역이라 말한다. 따라서 복음전파로서 선교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 가져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회심 시키는 사역이어야 하며 사회적 책임은 그리스도께 회심한 자들이 맺는 필연적인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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