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목사(전 총신대ㆍ대신대 총장, 현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장)

 
에큐메니칼 운동이 형제와 교회 갈라놓았다

WCC 가입 문제로 첨예한 대립…신학 충돌을 교권다툼으로 부각, 본질 흐려
불법 총회진행·신학교 습격은 ‘이탈’ 증거… ‘개혁주의’ 공통분모 잊지말아야


▲ 정성구 목사
합동측 장로교회와 통합측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 같은 뿌리로서 신조와 교리와 정치에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9년 WCC 에큐메니칼 가입문제로 서로 나눠진지 벌써 54년이 되었다.


1.1959년을 전후한 한국 장로교회의 분위기

1950년 초에 기장이 분열되고 고려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은 한국 장로교회는 수년 동안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가던 중에 이른바 세계교회협의회 곧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로 교회는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 당연히 교회 안에는 WCC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WCC 운동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또 WCC를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연합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한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창설자인 마포삼열 박사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사수하고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한 보수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본국의 신학과 신앙과 정치에 따라서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담하도록 적극 지지할 뿐 아니라 총회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여 영향력을 과시했다.


2.3천만환 대 3천만환

당시 기록을 보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기를 든 분은 장로회 총회 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박형룡 교장은 학교 부지를 구입하려다가 박호근에게 걸려 3천만환을 사기 당했다. 사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자일 뿐 학교 행정에는 어두운 분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교권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공격했고 그 후 박형룡 박사는 사임하고 임시교장에 노진현 총회장이 시무케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통합측 모든 인사들의 강연, 세미나 그리고 유인물에는 합동측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것은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이며, 박형룡 박사를 옹호하기 위한 세력이 WCC를 반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1960년 3월 ‘총회장 수습위원장, 증경총회장, 총신동창회장 성명서, 2.17 집단의 무법성’이란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연동집단과 미국인 안두화씨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신학교 재단 이사회를 불법으로 등록하였고, 은행에 예금한 공금 약 3천만환 즉 보상금 2400만환 경상비 400만환을 재단 이사장이란 명의를 악용하여 회계도 모르게 비밀히 찾아내어 일방적으로 사용하였다. 교회일을 세상법정에 소송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나 문교부당국을 속여 재단 이사를 불법 변경한 것은 법에 의해 시정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부득히 법적 조치를 취한것 뿐이다. 이제라도 피고측이 불법 변경한 재단이사와 교장서리를 즉시 취소하면 법적고소는 취하하게 될 것이다.” 라고 총회장, 임원, 증경총회장들이 연명 날인했다.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은 사표수리로 귀결 되었으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섰던 안두화씨의 불법 사용한 3천만환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있다.


3.분열이냐 이탈이냐

1959년 이후에 모든 문건에는 통합측 총회 건을 분열과 이탈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두 가지 이유로서 이탈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통합측은 총회법에 맞지 않게 이루어졌다. 제44회 대전중앙교회의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를 받는 문제를 두고 개회만 하고 시간을 모두 허비해 버렸다. 그래서 정회 되던 날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진행의 묘방으로 총회속회를 증경총회장 회의에 회부하기로 총회에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증경총회장 회의에서는 11월 24일까지 정회하기로 하여 그 안을 한경직 목사가 부르고 명신홍 목사가 기록하여 총회장으로 하여금 총회에 제출하였다. 총회는 이 안에 가부를 물어 가결을 얻어 정회를 선언하고 기도로 마쳤다. 바로 정회가 이루어진 직후에 갑자기 안광국 목사가 단에 올라가서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자기 자신이 가부를 물어 몇 사람의 호응을 받아 서울로 올라와 연동교회에서 불법집회를 하고 총회라 칭했다. 교회는 헌법(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총회규칙 각부 규칙 등이 있는데 그 중에 불신임이란 없다. 세상법으로 하더라도 그같은 방식은 민주주의 세계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섭섭한 말이 되겠지만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통합측은 본 총회로부터 이탈이란 말이 된다.

둘째는 신학교의 이탈이다. 1959년 11월 17일 신학교가 아직도 종강을 하지 않았는데, 학생들과 사무직원이나 일방의 이사나 교수에게 일절 알리지도 않고 선교사들과 계일승씨는 신학교 직원 김규당, 박창환, 김윤국 목사 등을 대동하고 트럭 5대와 수십 명의 인부를 데리고 11월 17일 새벽 미명에 평화롭고 신성한 신학교에 돌연 침입했다. 그들은 학교 수위의 반항과 거절을 물리치고 굳게 잠가둔 문과 자물쇠를 파괴하고, 학교 비품을 강제로 꺼내어 트럭에 싣고 황급히 도주하려 했다. 순간, 회현동 기숙사 학생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 선교사 배의취, 마펫, 곽안전, 옥호영, 데가보, 썰멜빌 제씨와 계승일씨 등은 학생들에게 추궁과 비난을 당하고 여러 가지 부끄러운 질문을 받고 심히 당황하였다. 선교사들은 운전기사에게 운임을 더 많이 줄테니 속히 옮겨달라고 하여 보았고 학생들에게 간청해 보았으나, 학생들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교직원들과 선교사들의 불법한 행동을 힐문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18일 새벽 4시 30분에 또 다시 군인 수십 명과 트럭 6대를 동원해서 신학교 습격을 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3선교회에 대한 경고문, 총회장과 2개 노회 연서)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얼마나 좋았으면 선교사들이 진두지휘하여 야간에 신학교의 물건을 가져가려 했을까 의문이다. 아마도 신학교의 물건 중에 선교사들이 후원한 것이 많아 가져가겠다는 것인데,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다. 역사적 사건인 만큼 그대로 밝히는 수밖에 없다.


4.교권충돌인가 신학충돌인가?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59년 대전 총회가 있기 전에 양측에서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 가입 여부를 두고 엄청난 설전과 성명전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1959년 1월에 우재(유호준 목사라함)란 익명으로 발표된 ‘에큐메니칼 반대운동에 대해 답변서’라는 성명서로서 WCC 탈퇴건의서에 대해서 감정에 찬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그 핵심적 내용은 WCC  반대하는 측을 ‘불순한 교권운동’ ‘반교회운동’ ‘부패한 교권주의’ ‘바리새교인’ ‘교회제도주의’ ‘교파주의’ ‘근본주의’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며 불신앙적 인사들’이라 하고 심지어 WCC 반대하는 사람들을 ‘분열주의자’ ‘사탄’이라고 세 번이나 지칭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저주와 비판을 여과없이 쏟아냈다. 이는 당시의 에큐메니칼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였고 세월이 반세기가 흘러가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있다. 한편 당시 이런 성명서를 보고 정제(조동진 목사)라는 익명으로 ‘우제의 답변서에 답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제의 답변서에는 우제의 글이 지나치게 과격한 문장임을 지적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법과 목표가 비성경적임을 증명했다. 특히 우재가 항상 정통보수임을 말하다가 갑자기 근본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이론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갔다. WCC 지지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세계 정세에 어둡고 무식한 사람들이고 폐쇄적이고 고립주의 사람이라고 비난했지만, 1958년의 조동진 목사는 국제 문제에 훤히 밝은 기독교 언론인 출신의 목사였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은 교권충돌이 아니고 신학충돌이다. 최근에 최덕성 교수는 에큐메니칼과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은 곧 신학충돌이라고 썼다. 오늘의 문제는 이미 55년 전에도 한국 장로교회에 있었던 내용이다.


5.개혁주의 신앙이냐? 에큐메니칼 정신이냐?

1959년 총회가 나누어진지 40년 되던 1999년과, 50년 되던 2009년에, 양교단의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특히 40주년 되던 해는 양측 대표 3인이 대전 중앙교회 당회장실에 모여 서로 대화와 소통을 갖고 함께 화기 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오찬을 나누었다.(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 총회장끼리 강단 교류도 있었다. 그런 후에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처음으로 합동측 대표 50명과 통합측 대표 50명이 함께 포럼을 가졌고 방청객과 교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여기 대표는 양측 총회임원, 원로목사 대표5명, 신학교 교수대표 5명, 장로대표 5명 등등 각 분야에서 5명씩이 나왔다. 주제 강연자로는 필자와 이종성 박사가 나섰다. 필자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하나되자’라고 제목을 정하고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과 신앙으로 공동분모를 갖고 있으니 개혁주의 신앙으로 하나 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내 뒤에 강연자로 나온 이종성 박사의 제목은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하나되자’고 했다. 결국 공동분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에큐메니칼 운동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형제가 갈리고 교회가 갈리는 뼈아픈 상처를 도리어 덧나게 했다. 합동측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교회들과 교회연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나 지금이나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지면은 총회WCC대책위원회(위원장:서기행 목사) 협조로 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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