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담요로 추위 견디며 밤새도록 기도”
북에 두고 온 혈육 생각하며 매 기도회 참석… “교단사랑 배웠다”
그는 1964년 서울 충현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집회에서부터 금번 집회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목사장로기도회에 참석한 역사의 산 증인이다.
“초창기에는 기도회가 3월에 열렸습니다.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을 무렵이어서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군용담요 하나씩 덮고 추위를 견디며, 새벽부터 밤이 새도록 기도하던 시간들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김한범 장로는 오래 전 겸이포라고 불리던 황해도 송림 출신이다. 제25대 총회장을 지낸 이승길 목사를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다, 해방 후 북에서 벌어진 탄압을 견디지 못해 월남을 강행했다. 단신으로 월남한 후 다시 북에 남아있던 아내(조인선 권사)와 자녀들을 목숨 걸고 찾아오며, 이후 전쟁 발발로 피난길에 오르기까지 그는 격랑의 시대 한가운데 있었다.
“두고 온 고향과 혈육들을 생각하면 항상 그리움에 사무칩니다. 그래서 매일처럼 새벽예배에 나가 기도하는 제목도, 목사장로기도회에 참석해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제목도 다름 아닌 나라를 위한 것들입니다.”
5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김 장로가 목사장로기도회에 개근할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겨레와 통일에 대한 남다른 마음가짐이 있기도 했지만 다른 배경도 있다. 바로 자신을 이끌어준 신앙의 리더들에게서 배운 교단에 대한 사랑이다.
남쪽으로 내려온 후 김 장로는 한 동안 인천에 머물며 생활하다, 전남 무안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한다. 이곳에서 몸담게 된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일로제일교회의 전신인 부흥정교회였다. 시무장로를 거쳐 원로장로가 되어서까지 70년간 시무한 그에게는 두 명의 잊지 못할 담임목사가 있다.
“제4대 전상성 목사님과 얼마전 은퇴하신 제6대 박창오 목사님, 두 분 다 30년 넘게 일로제일교회를 담임하시면서 목회는 물론 총회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게 가지신 분들이셨습니다. 이 분들의 지도 덕택에 교단에 대한 자부심과 동질감을 배울 수 있었고, 목사장로기도회 기간에는 모든 일정을 비우고 달려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장로 70세 정년제가 총회에서 정식 결의된 바로 그 해 교회에서 첫 원로장로가 되고, 은퇴 후에는 전국장로회 총회에서 제1호 모범장로로 선정돼 표창을 받는 등 김한범 장로에게 있어 교단은 생애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은퇴한 지 20년을 넘기고서도, 목사장로기도회에 지역의 후배 장로들을 이끌고 와 일체감을 형성하는 일에 앞장선다.
“초창기 목사장로기도회에는 새벽기도부터 모든 집회에 출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철야기도 또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갈수록 그런 기도 중심의 분위기가 희석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외부인들의 출입도 막고, 교단 어르신들이 현장에서 기도 외에 다른 일들은 일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던 엄숙한 분위기가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김 장로는 끝으로 우리 교단의 긍지인 보수신앙이 결코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이를 잘 지켜나가고 젊은 후배들도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으면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