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목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한국 장로교 출발부터 선교엔진 튼튼했다

“선교하지 않으면 진정한 장로교회 아니다” 정신 무장, 선교중심 교회로 출발
독노회 창립기념 제주 선교사 파송 이어 1912년 창립총회 때 중국 파송 결의

▲ 정준모 목사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독노회 창립과 1912년 총회 창립 기념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만큼 선교지향적 교회이다.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병의 국치, 36년 일제 식민 통치, 1950년 한국전쟁, WCC 교단 분열 등 수많은 전쟁, 수탈 및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생명력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교지 교회에서 선교지향 교회로 우뚝 섰다. 한국 장로교회는 총회 설립 100년 만에 세계에서 단일 교단으로 세계 장로교 교단뿐 아니라 초교파 모든 세계 교단 중에서 제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기록을 세웠다.

본 글을 통하여 장로교 선교 사상과 신학의 뿌리, 장로교 선교사들에 세운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 모습, 독노회 및 총회 창립 당시 선교 정신과 열정, 세계선교의 중심축인 한국 장로교회 선교 사역, 새로운 100년의 선교비전 정책방향과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장로교 선교 사상과 신학

선교 신학자 블라우(J. Blauw)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는 없고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 이외의 다른 선교는 없다”고 했다.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정치 원리의 거장인 존 칼빈은 선교지향적 목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목회 활동, 문서 활동, 학교 사역, 설교 사역, 그리고 다양한 저서 등을 통하여 선교에 대한 자신의 뜨거운 열정을 심오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온 세계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선교지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선교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선교학자 사무엘 즈웸머(Samuel M. Zwemer)의 평가처럼 “칼빈은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도 1890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던 제1차 개혁교회 세계선교 대회의 주제 강연에서 “개신교 선교 사상은 칼빈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데이비드 칼훈(David B. Calhoun)은 “칼빈은 선교적 영웅인가? 아니면 선교의 실패자인가?”라는 글을 통하여 “칼빈의 신학은 원래 선교적인 것이었다”고 하였다. 칼빈이 해외 선교의 강력한 추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통치 안으로 인도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였다.

이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계 곳곳에 확산되도록 모든 선교적인 열정을 다하였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모든 설교에서 항상 선교 사상을 전제하였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인간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칼빈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하는 것이 선교적인 의무와 사명이라고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은 곧 부패한 로마천주교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개신교 운동이요, 장로교 운동이었고 이것은 곧 장로교 선교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로교 정체성을 가진 청교도들의 신대륙 정착, 미국 대각성 부흥 운동, 미국 장로교회 성장, 학생선교자원운동(SVM) 등으로 선교의 열정이 일어났다. 그 결과, 칼빈주의 후예자들인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 복음화의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어 오늘의 세계 제일의 선교 파송 교단의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 세운 한국 장로교회

▲ 일러스트=강인춘
기독교와 조선인과의 접촉은 보통 200년 전후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하여 천주교와 접촉을 하게 된다. 개신교는 1832년에 독일 루터교 목사 귀츨라프가 최초로 조선인과 만나면서 시작됐다. 그 후 화란인, 영국인과의 접촉이 여러번 있었고 만주지방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와 접촉이 있었다.

1872년 중국 선교사로 존 로스(John Ross), 멕킨타이어(McIntyre) 등은 만주 지방에서 조선인들에게 첫 세례를 주었고, 최초 한글 번역판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였다. 1887년 존 로스가 번역한 첫 한글 신약성경본인 <예수셩교젼셔>가 간행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한국 선교는 1880년 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조선의 개항이 1876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884년 미국, 1889년 호주, 1898년 캐나다 교회를 통해 장로교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 선교는 미국 장로교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해방 전까지 내한한 선교사의 총수는 약 1500명이다. 그 중 약 70%가 미국 선교사이다. 한국 장로교 선교사 671명 중 76%인 518명이 미국 선교사이다. 이것은 초기 한국 선교에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임을 알 수 있다. 1893년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사들이 ‘선교사 공의회’라는 연합체를 만들어 선교지 분할정책을 수립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예양협정’(禮讓協定, Comity Arrangement)라고 한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는 제령, 강계, 평양,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지역을,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을, 호주 장로교회(후에 캐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 호주 장로교회는 부산과 경남 일대 지역을 분할하여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선교 활동의 인적, 물적 낭비를 막을 수 있는 긍정적인 면과 신학과 교회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는 부정적 요인 낳게 되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역사로 확산되어 한국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첫째, 한국교회의 수적, 질적 성장을 가져왔다. 둘째,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인간의 공동체의식이 생겼다. 셋째, 한국교회 신앙성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넷째, 사회 변혁에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전도 운동과 선교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특별히 대부흥운동으로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1907년을 지나면서 초기 한국교회가 조직되어 신조 채택, 당회, 노회, 총회 조직 및 신학, 예전 등을 모든 신학적, 법적, 목회적 정비가 이루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07년 독노회 설립과 191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창립으로 한국교회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독노회 및 창립총회의 선교 정신과 열정

1907년 9월 17일 독노회(회장:마포삼열)가 장대현교회에서 창립되었다. 독노회 창립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적 결정이 있었다. 또한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회장:언더우드)가 1907년 독노회 때 조직한 7개 대리회(代理會)를 개편하여 7개 노회를 만든 후 역사적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창립총회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 내양에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고 외국 선교를 위해 매년 감사주일에 특별기도와 특별헌금을 전국 교회가 실시하도록 결정한 일은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 열정과 선교 중심으로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놀라운 역사적 증거이다.

곽안련 선교사의 <장로교회사 뎐휘집>은 한국 장로교 선교 정신과 열정에 대하여 잘 기록하고 있다. 독노회가 조직된 다음 날인 1907년 9월 18일에 전도위원회를 외지 전도국으로 확대 변경하였다. 이때, “선교하지 않으면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다”는 결의문을 채택할 정도로 초기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 중심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독노회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전도국장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에 파송하기로 하고 선교사의 봉급과 용비는 전국 노회가 연보하여 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재정마련을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선교사역은 전국 교회가 함께 협력하고 동참해야 한다는 장로교 선교 신학 원리와 일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전국 노회가 함께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평양노회 여전도회가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단 선교에 동참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또한 평양 남학교와 학생선교회에서 학생 사역자 김현철을 제주도에 보낸 일과 당시 장로교 소속 목포 선교부의 선교사들의 의료선교팀이 함께 동역을 함으로 비록 작은 규모와 팀이지만 한국 최초 선교는 독노회 파송 선교사와 남장로교 의료선교사의 국제적 팀선교가 최초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주도 선교는 야소교에 대한 증오와 핍박, 미신극심, 언어문제, 이질문화 등 선교지의 난맥상을 극복하고 5년동안 예배당 3곳, 예배처소 2곳, 160여 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 또한 1934년에는 제주도에 약 30개 교회가 개척되는 등 놀라운 부흥과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 이후, 1908년 독노회서 한석진 목사를 3개월 일본 동경에 파송하여 장로교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또한 그 이듬해에 한국 장로교회는 재미 대한기독교회와 일본 복음자유교단 및 여러 단체들과 협력 선교사역을 하였다. 1909년 독노회에서 제 2회 신학교 졸업생인 최간흠 목사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여 조선 이민자 목회사역을 감당케 하였다.

한국 장로교 최초 선교의 역사적 의미

1912년 한국 장로교 창립총회가 조직되었다. 창립총회의 감사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한 후, 그 이듬해인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를 파송했다. 한국 장로교 총회가 공식적으로 타문화권에 선교사를 파송한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유교권의 자부심, 각종 우상숭배, ‘소국’ 조선인 선교사에 대한 무시, 중국인의 음주습관, 여성족발 풍습, 절대가난, 의식주 문제 등 어려운 선교지 여건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으로 선교 현장에 복음의 열매가 맺게 되었다. 당시 방효원 선교사의 선교보고서에서 “중국사람들이 천당 가고 지옥가는 것이 조선교회에 달렸다”는 표현은 조선인 선교사들과 이들을 파송한 초기 한국교회의 위상을 보여준다.

1937년 파송된 방지일 선교사는 모택동 문화혁명으로 강제출국될 때까지 교회개척, 지도자 양성, 전쟁난민사역, 핍박교회 격려 등 총체적 선교에 힘쓰다가 1957년 9월에 귀국하게 된다. 1912년 한국 장로교 창립 이래, 중국 선교가 중지될 때가 8명의 선교사, 1명의 여전도사, 3명의 평신도 의사, 1명의 남성 평신도, 3명의 여성 평신도가 장단기로 선교에 동참하였다. 한국 장로교회의 최초 중국 선교는 몇 가지 선교 역사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창립 총회 석상에서 황해노회의 박태로 목사를 선교사로 지명함으로 창립 총회는 선교 총회로 출발하였고, 해외 선교 파송으로 선교의 주되신 총회창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 이것이 오늘 세계 선교 강국이 된 한국교회의 기념적 불씨가 되었다. 둘째, 초기 한국 해외 선교는 독노회 및 총회 산하 모든 노회가 적극 협력 동참하였다. 평양노회, 평북노회 등 여전도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 세계 선교의 여전도회의 큰 협력과 목회자 및 평신도, 목회자 및 의료 전문선교사가 함께, 또한 조선인 목회자와 평신도 그리고 당시 사역하고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장로교 및 감리교 등 선교를 위한 연합체를 형성하여 미력하나마 총체적 선교가 이루어졌다. 셋째, 총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총회 훈령인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따라 선교하도록 지시하였고 필요시 현지 방문으로 선교본부와 선교사간의 정책수립 확인을 긴밀하게 행하였다. 그 결과, 1942년까지 총회 파송 선교비 절반 이상이 절감되었고 중국 현지 교회가 자립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선교사들이 중국 자국민을 훈련하여 가가호호 방문 전도, 십일조 생활, 성경공부반 운영, 절기지키기 운동 등을 전개하여 선교지 교회가 건강하게 자립하는 선교지 교회로 세워나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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