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직분의 계급화

 
‘절대 권위’, 공동체 흔들고 무기되다

교회 분쟁·교단 분열의 불행한 씨앗…전횡 아닌 건강한 리더십 만들어야

▲ 일러스트=강인춘
“권위라는 것, 참 무서운 힘입니다.”

설교는 그렇게 시작했다. 몇 달 새 장로들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온 담임목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던 미리암이 받은 형벌에 대해 기록된 민수기를 읽어나갔다. 단단히 작심한 양 설교자의 입에서는 리더에게 저항하다 파멸한 성경 안팎의 사례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성경본문을 강해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듣는 입장에 따라서 그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위협이나 한풀이에 가까워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배시간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리였기에 누구도 제지하거나 불만을 터뜨릴 수 없었다. 분위기는 침울했고, 살벌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아멘’소리 한 번 나오지 않은 채 설교는 마무리됐다.

70~80년대 부흥회 설교에서나 임직식 권면 같은 데서도 민수기 12장은 즐겨 사용되는 레퍼토리였다. 표면적으로야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존중하고, 담임목사의 리더십을 잘 뒷받침하여 튼튼한 공동체를 세우라는 뜻의 메시지였지만, 저변에는 목회자에게 함부로 반기를 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성격이 뚜렷했다.

개척교회 시절에는 스스럼없이 교우들과 어울리던 소탈한 모습의 목회자도 교세가 늘어나면, 차츰 만나기도 어려워지고 교인들의 평균수준보다 휠씬 높은 레벨의 저택과 승용차를 소유하면서 다른 세계의 존재로 돌변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위화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보다는 이를 지극히 당연한 변화로 보는 견해들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목회자라는 자리는 한국교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가톨릭의 ‘교황무오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개신교회가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회자무오설’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히며 전철을 밟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느 40대 초임장로는 지역장로회 모임에 참석차 이웃교회를 방문했다가, 명설교가이자 유능한 목회자로 알려진 해당교회 담임목사가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장로에게 반말조로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런 비인격적인 모습까지도 순복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생각에 한 동안 괴로웠다고 한다.

이제 교회문화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목사의 절대권위를 강조하며 낯 뜨거운 멘트까지 공공연히 하는 인사가 적잖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담임목사가 사실상 독단적으로 재산처분이나 공금지출, 심지어 후임자 선정 같은 중대 사안들을 결정하여 문제가 되는 사례들이 빈발하는 것을 보면 20~30년 전과 크게 바뀐 것은 없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직분을 계급으로 오해하여 빚어지는 혼란이나 갈등이 목회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장로들의 전횡이 목회자나 대다수 성도의 권리를 침해하고, 비이성적으로 압제하는 경우 또한 허다하기 때문이다.

농촌지역의 ㄱ교회는 약 7년 주기로 담임교역자가 바뀐다. 심지어 시무한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교역자의 영향력이 장로들보다 강해진다 싶어지면, 무슨 시비를 붙여서든지 기어이 교회에서 내보내고 만다. 이러한 일이 자주 반복되어 소속 노회에서 문제를 삼을 기미가 보이자 해당 교회의 당회는 교단 탈퇴를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 설립자가 장로로 있거나, 전통이 오래된 경우일수록 권력의 무게가 장로들에게 쏠려있는 경우가 많다. 제법 긴 역사를 가진 ㄴ교회에 부임한 어느 50대 목회자는 첫 소집한 당회에서 황당한 요구를 들어야 했다.

“당분간 외부집회는 삼가주십시오. 현재 하고 계신 신학교 강의나 선교단체 사역도 중단해주세요. 꼭 출타하실 일이 있더라도 당회의 허락을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혹 책을 쓰실 일이 있어도 몇 년 후로 미루어주십시오,”

정중한 요청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 목회자인 동시에 신학자로 살아온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려했지만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요구에 황당했던 그는 나중에 주변에서 ㄴ교회는 그런 식으로 갓 부임한 목사들의 ‘기강’을 잡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욱이 장로정치를 근간으로 삼고 있는 장로교회 체제에서 시무장로들의 권한은 담임목사의 그것에 못지않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러나 권한의 남용이 지나치다보면 목회자들의 정당한 리더십 발휘나, 대다수 성도들의 타당한 여론까지 제약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십 수 년간 교단을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을 조장한 주요 사건들 중에는 이처럼 담임목사와 당회원들, 혹은 당회원과 대다수 교인들 사이의 반목에서 기인한 사안들이 매번 반드시 끼어있었다. 특히 대형교회일수록 둘 사이의 분쟁은 사회법정으로까지 번지며 수년씩 장기화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은 물론 다음세대들이나 초신자들을 교회에서 떠나게하고, 심지어 안티기독교세력을 양산시키며 교회를 파괴하는 주요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직분은 위계 아닌 질서다”

소수의 권력독점은 장로회 정치근간 흔들어

문제의 근본은 누구나 알다시피 교회의 직분을 권력으로, 섬김이 아닌 지배로, 직책이 아닌 계급으로 오해하는데서 비롯된다. 때로는 교회에서 중직을 맡는 것을 일종의 ‘신분상승’으로 여겨 여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조석민 교수는 지난 5월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현재 한국교회의 형편은 권위주의와 성공주의가 교회 안의 직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면서 “교회의 직분은 위계가 아니라 질서의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장유유서나 사농공상식의 서열을 꼼꼼히 따지는 오랜 유교적 풍습에다, 일제시대와 군사정권을 거치는 근대화기간 만연화한 독재적 문화 속에서 성장해온 한국교회에는 직분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팽배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장로회 정치에 대해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부연하자면 목사나 장로라는 소수의 직분자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일방 통행하는 목회나 교회정치는 장로교회의 ‘민주화’ 원칙을 철저하게 위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직분과 은사에 대한 성경적 취지를 살리고, 교회 내 권력독점을 방지하자는 뜻에서 목사·장로 시무투표제나 당회원 임기제 등을 도입하자는 주장들이 나오고, 실제로 이를 실시하는 교회들도 나타나지만 아직까지 교단이나 교계 전반으로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다.전 세계적으로, 모든 분야별로 민주화 바람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미 우리사회의 민주화 속도를 교회만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겸허히 귀 기울여야 한다. 직분의 계급화문제를 개인적 품성과 양심에 얽힌 문제로 한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위험성마저 줄여나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제도의 개선이다. 더욱 건강하고 공정한 교회문화를 위해서 이제 교회의 정치제도를 향해 우리의 시각을 돌려야할 때이다.

“국가나 종교, 도덕이나 학교교육도 완전한 제도는 없다. 더 이상 발전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제도라고 믿는 순간 그 국가, 그 종교, 그 도덕, 그리고 그 학교교육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모든 제도는 지구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한다.”

-전성은 저 <왜 학교는 불행한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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