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성경에서 이탈한 설교

▲ 일러스트=강인춘
“복 받아라!”
1970년대, 부흥회나 신유집회에서 강사들이 종종 사용하던 말이다. 강사들이 마치 무엇인가를 던지는 제스처를 보이면 참석자들은 “아멘”하면서 마치 복이 잡히는 듯 두 팔을 뻗곤 했다. 물론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이러한 원색적 기복신앙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성경에서 이탈한 설교와 신앙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기복, 독이든 사과?

“하나님 열심히 믿었는데 왜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기죠?” 교회에서 흔히 듣는 질문이다. 주일 성수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했는데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려움만 줬다는 원망이다. 이 원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신학자들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류응렬 교수(설교학)는 “설교자들이 기복신앙에 호소하는 이유는 청중의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유혹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성경에서 벗어난 기복설교의 몇 가지 유형들을 살펴보자.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에 한국교회를 강타했던 삼박자 구원론.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물질 축복, 건강 축복이 덩달아 따라온다는 이론이다. 믿고 구원받으면 한 박자, 그 후에 잘 살면 두 박자, 건강하면 세 박자라는 것이다. 이 삼박자를 다 갖춰야 좋은 신앙이라는 설교가 유행했었다. 삼박자 구원론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을 기복신앙으로 왜곡한 것이다.
기복설교의 또 다른 형태는 ‘우리의 열심과 헌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라고 가르치는 설교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좀 더 열심을 내라,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 좀 더 거룩하도록 노력하라, 주님의 축복을 위해 좀 더 봉사하라는 식이다. 즉 축복이라는 열매는 땀을 흘려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시며, 주신다. 그러나 문제는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문제다. 또한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강단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목회자들이 기복설교의 유혹에 빠질까? 신학자들은 “기복주의 설교는 단 시간에 성도들을 끌어들이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1970년대에 기복설교도 덩달아 유행했던 것이다.

십자가 없는 설교

기복설교가 널리 퍼졌던 또 다른 이유는 한국사회의 특징도 한 원인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서민들은 매달릴 대상이 필요했고, 196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성공주의가 등장해 기복설교를 더욱 확대해 갔다.
2000년 초 한국교회는 기복설교에 대한 반성이 많았다. 그래서 현재 기복설교는 많이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십자가가 없는 설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성구 박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는 “오늘날 경건한 실용주의 때문에 설교자들은 복음의 순수성과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난 설교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성구 박사는 교양설교, 심리학설교, 이야기설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대표적인 설교로 지목한다. 교양설교는 사랑 평화 정의 겸손 헌신 나눔 등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덕목과 교양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 동서고금 성현의 말이나 문학작품을 인용하면서 유익하고 좋은 말들을 집어넣는다. 그러나 교양설교는 대부분 인본주의적인 접근을 한다는 점이 문제다. 정성구 박사는 “인간은 자기 결정에 따라 역사를 바꾼다든지, 꿈꾸는 대로 된다든지, 오늘의 선택이 미래의 삶을 바꾼다는 식으로 전개한다”면서 “이런 설교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고무적이고 용기를 주는 메시지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을뿐더러 복음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심리학설교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성구 박사는 “심리학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려진 비복음적 설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골치 아픈 계시와 교리는 그만두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 된다”는 이야기설교는 서구의 자유주의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정성구 박사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설화신학과 설화설교가 교파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교회에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침체 원인 된 성장주의 설교

결국 현대 한국교회 강단은 기복설교의 형태를 벗어난 듯 하지만 오히려 그 자리에 인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설교자들은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을 전달하지 못하고, 듣는 귀가 얇아진 성도들은 심장을 찌르는 설교를 외면한다. 그 결과는 한국교회 침체라는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고 있다. 복음의 능력이 없는 설교는 성도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이런 성도는 쉽게 교회를 등지게 되어 있다. 교인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시도한 성장주의 설교가 오히려 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서 예언자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었다.” 2010년 12월,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가 은퇴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남김 마지막 메시지 중 일부다. 과연 그만의 고백일까?

▲ 류응렬 교수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성장하고 쇠퇴한다. 성경적인 설교가 강단에 울릴 때 건강한 기독교가 세워지고 인간적인 설교가 귓전에 울릴 때 교회는 사멸한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100년을 바라보면서 성경적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에 부으셨던 놀라운 부흥을 다시 꿈꿀 때가 되었다.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회복을 위해 다섯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설교자의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설교자란 하늘의 소리를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사람이다.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 설교의 시작이라면 진리의 말씀으로 현실의 땅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설교의 방향이 될 것이다. 설교자란 하나님이 전하실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교자를 부르시고 신뢰하셔서 그에게 말씀을 맡기셨다. 설교자의 가슴은 강단에 설 때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감격과 감사가 넘쳐야 한다. 설교자란 말씀을 통해 사탄의 품 안에 빼앗긴 영혼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다. 생명을 던지는 각오 없이 생명을 살릴 수는 없다. 강단에 설 때마다 오늘 설교가 지상에서 하는 마지막 설교라는 비장한 각오로 서야 한다. 나에게도 마지막이고 듣는 사람에게도 마지막일 수 있다. 어찌 한 마디라도 함부로 설교할 수 있겠는가. 한 편의 설교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설교자다. 사람은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하나님의 더 큰 관심은 한 사람의 설교자를 만드는데 있다.
둘째, 설교의 목적을 회복해야 한다. 설교란 진리의 말씀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내고 살아난 사람들을 거룩한 제자로 세우는 일이다. 오늘날은 설교가 교회성장의 중요한 도구로 전락되어 설교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 성도들이 감동 받고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설교가 추구되는 시대다. 설교란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통로다. 칼빈은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다” 라는 말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계시하신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설교란 목회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생명사역이다.
셋째, 성경적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 성경적 설교란 두 가지가 핵심이다. 하나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왜 전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설교의 내용이 본질이고 내용을 살려내는 것이 전달이다. 설교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본문 연구를 통해 하나님이 들려주고자 하는 음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교의 모든 기반은 사라진다. 성경적인 설교란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과 성화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청중에게 적실한 적용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본문에 치중되고 삶이 부재한 설교는 공허하고 삶의 이야기만 난무하고 성경은 디딤돌로 사용되는 설교는 허약한 기독교를 배태한다.
넷째, 삼위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 성경은 타락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것과 구원 받은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설교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그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중심 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적 설교로 전락하고 만다. 강단에 오를 때마다 설교자는 물어보아야 한다. 오늘 설교에서 사람들은 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했는가? 설교할 때마다 예수님이 회중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들으시고 고개를 끄덕이는 설교,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설교다.
다섯째, 성령이 주도하는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자신이 죽고 주님을 살려내는 것이 설교다. 설교에 따라 설교자의 등급이 매겨지거나 설교만 가지고 교회를 선택하는 풍조는 사라져야 한다. 설교자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뛰어난 전달력으로 사람들의 감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성령이 설교자를 통해 영혼을 터치할 때 죽은 영혼을 살아나고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삶을 향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설교가 한국 강단에 강물처럼 흘러 민족과 세계를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교회로 한국교회가 불타오르기를 열망한다.

류응렬 교수(총신신대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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