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분열·난립과 지역주의

 
“우리가 남이가” 교회 흔들었다

교단 분열 표면엔 신학 문제, 배경엔 지역주의 반목 자리잡아

▲ 일러스트=강인춘
#1  K집사(49)는 지난 5월 어머니 추도예배를 드리러 고향인 전주에 갔다. 모처럼 5남매기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5남매가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교단이 제각각이다. K집사 가정의 5남매는 모두 전북 J군에서 태어났다. 교회 역시 예장합동 교단에 출석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형제들은 전주로 나왔다. 교회는 고향교회 목사님이 추천해 주는 곳으로 이명해 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출석교회 교단이 서로 달랐다. 분명히 고향교회 목사님이 추천해 줄 때는 예장합동이었는데 형제들의 출석교단이 예장통합, 예장개혁, 예장보수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1979년과 1980년 사이 예장합동의 소위 주류와 비주류 논쟁으로 교회마저 분열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지금도 K집사 가정 형제들은 서울 전주 대전 익산 등지에 살지만 예장합동, 통합, 합동보수, 합신 등 4개 교단의 교회에 다닌다.

#2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모 교회에 출석하던 L집사(48)는 3년 전, 30년 가까이 다니던 교회를 옮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힘들 때 찾은 곳이 교회였다.
L집사는 공구상에서 일하다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 도림동에서 자동차 카센터를 운영하며 열심히 살았다. 못다한 공부도 하기 위해 대학도 다녔다. 주일성수도 온전히 하고, 새벽예배도 빠지지 않았다.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찬양대원으로 봉사도 했지만 늘 보이지 않는 ‘거리’를 느꼈다.
교회에  L집사 부부 이외에 호남출신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원로목사와 현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7명의 장로도 모두 영남 출신이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L집사는 믿음의 분량이 적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안수집사로 피택도 받지 못한 채 결국 교회를 떠났다. 교회에서도 지역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는 것이 L집사의 항변이다.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표면적으로 신학적 문제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신학 외적인 이유도 다분하다. 1953년 고신과 기장이 분열되어 나갈 때는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가장 컸다. 하지만 1959년 예장합동에서 예장통합이 이탈할 때는 에큐메니칼 신학사상으로 장로교가 홍역을 앓았다.

기장측이 분열할 때 주류를 이룬 세력은 함경도와 기호지방, 전라도 출신이 대다수였으며, 장로교측은 서북지역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상도 지역 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지로서 신사참배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평가받았지만, 서북중심의 기득권 세력에 소외되어 있다가 기장측에 합류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예장합동에서 통합측이 이탈해 갈 때도 합동측은 황해도 출신, 통합측은 평안도 출신이 주류를 형성했다. 당시 교단의 중심세력은 박형룡 목사였다. 박형룡 목사 주변에는 황해도 지역 출신자들이 많아 그를 반대하는 평안도 출신의 목회자와 반목이 심했다.

1979년 예장합동에서 소위 주류와 비주류 문제로 합동보수측이 이탈했던 것은 신복음주의를 둘러싼 총신대의 신학적 갈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신학교에서 주도권 문제를 놓고 밀려난 정규오 목사측이 소위 이영수 목사측에 더 이상 대항할 수 없어 이탈해 나갔다는 것이 대부분의 견해다. 비주류측은 불공평한 임원선출과 신학교 이사선출에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다가 교권싸움의 불평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1980년 총신대에서 몸담고 있던 박윤선 박사가 합동신학원을 분리해 나갈 때도 파장은 컸다. 합동신학원은 교단이 없어 개혁측과 손을 잡았다. 이후 교단과 신학교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개혁측 내부에서 합동보수와 비주류측의 연합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합동보수는 2년뒤, 호남계의 개혁측과 이북 및 호남 일부로 구성된 합동보수로 또다시 양분된다. 이후 합동 비주류에서 홍은동측, 홍제동측 등 걷잡을 수 없이 분열이 확산되어 장로교단을 형성하며 분리해 나갔다. 지금 한국장로교는 교파가 150개에서 200개에 이른다는 보고만 있을 뿐, 확실한 통계도 알 수 없다. 합동 비주류의 핵분열은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이것이 현재 한국장로교 분열의 자화상이다.

▲ 대구동부교회에서 열린 제64회 총회. 이때, 비주류였던 ‘호남파’가 이탈하여 합동보수교단을 설립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여러모로 사회적인 지탄이 되고 있다. 교회성장의 이면에 감춰진 부정적인 평가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교회가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사회에 공헌한 것을 인정은 받고 있지만,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존립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과거에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고 방향을 제시했는데 지금은 한국사회가 오히려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이렇게 가서는 안된다고 ‘훈수’까지 듣는 입장에 놓여있다. 심지어 한국교회가 신뢰를 상실한 것은 둘째치고, 교회 자체가 사회분열의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도 듣고 있다. 그 정점에는 교단과 교파의 분열이 가장 크다. 또한 교회의 이기주의와 지역주의도 한몫하고 있다.
최근 감독회장 선거로 수 년째 홍역을 치르고 있는 감리교 사태며, 순복음교회 분열과 여의도의 분쟁, 거기다가 금권선거로 얼룩졌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행보 등은 한국사회에 ‘개독교’를 넘어서 ‘염증을 느낀다’는 표현까지 불러왔다. 사회법정에서 교회로 인한 분쟁이 4분의 1을 넘어설 정도로 기독교의 자기정화는 거의 통제불능 상태라는 얘기도 들린다.
20세기에 한국교회는 성장하는 교회를 목표로 달려왔다. 이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성숙한 교회로 거듭날 것을 표방하며 10년을 보냈다. 하지만 교회의 섬김과 나눔은 고사하고 세상과의 공동체에서 집단 이기주의 단체로 매도 당하고 있다.
사실상 그동안 한국교회는 개혁이 가장 안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교단간 파벌 싸움은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만 비일비재 했고, 금권선거는 도를 지나쳐 이뤄져 왔다. 교파의 분열은 겉으로 신학과 신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지역갈등과 교권을 둘러싼 자리다툼이 우선이었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개 교회 문제들이 속속 터지고 있다. 속을 들여다보면, 목회자와 교인간의 갈등이 대부분이다. 거기서 더 깊이 내용을 파고들면 재산과 관련된 부분이 십중팔구를 차지한다.
한국장로교의 분열은 늘 지역과 맥을 같이해 왔다. 후삼국 시대도 아닌데 서울서북, 호남, 영남의 고착화된 지역구도는 깨지지 않는다. 신학과 신앙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결론은 ‘우리가 남이가?’라고 끝난다.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지역구도를 부추기고 있다. ‘안동파’ ‘호남파’ ‘서북파’ 등의 얘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문제를 파벌과 지역구도로 귀결되는 시키는 것은 더 이상 기독교를 포기하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이러한 파당과 지역주의는 이웃교회나 사회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 교인들끼리 코이노니아만 내세우는 편협한 교회로 전락하고 있다.
그래서 교단이나 교파의 존립과 아랑곳없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사회와 벽을 쌓는 자폐집단으로 교회가 인식되고 있는 것도 부인하고 싶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배타주의에 대한 사회적인 지적에 겸손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들과 함께 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된다는 말이다. 또한 분열보다는 연합을 도모하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고 말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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