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기독교성장 주춧돌-평신도운동

 
한국장로교 100주년 숨은 공신 ‘평신도’

청년·여성·주일학교서 교회 변화 이끌며 복음전파·사회개혁 앞장

 

①평신도운동은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는 데에 일익을 감당하며 지금까지도 성장을 계속해오고 있다. 사진은 제3회 학생 CE 수양회 및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의 모습이다.
②제5회 CE 정기총회.
③제2회 여전도회 전국대회 총회 당시 기념사진.
④부산해양고등학교에서 열렸던 제9회 전국주일학교연합회 교육대회.

한국장로교가 100주년을 맞이하는 데에는 외국인 선교사와 목사 등 사역자들의 노고도 컸지만 평신도들도 큰 몫을 담당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외국인 선교사의 복음전파에는 그들을 위해 집을 빌려주고, 통역을 하고, 후원금을 내준 평신도들의 헌신이 있었으며, 목사의 사역에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동역한 교회 직분자들의 공로가 있었다.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외국에 있던 성도들이 성경을 번역해 고국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평신도들의 영성은 사역자들 그 이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청년, 여성, 주일학교 교사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평신도운동의 대표다.

사회변화의 불을 댕긴 ‘전국청장년면려회연합회’ 

기독청년면려운동은 어느 교파를 배경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기도회를 통해 자체적으로 생겨난 것이 특징이다. 면려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시에 있는 웰링스턴교회 클락 목사에 의해서 시작됐다. 1881년 2월 2일 교회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청년면려회(CE)를 조직한 클락 목사는 기도와 성경연구 전도운동에 박차를 가했으며 이는 미국 전역에 큰 운동으로 번지게 됐다.

이후 인도 영국 캐나다 등에 면려운동이 전파됐으며 1892년 클락 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조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안동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안대선(Wallis Anderson) 선교사에 의해 소개됐다. 안대선 선교사는 미국에서 일어난 면려운동의 성과를 듣고 한국에서도 이를 소개하기 위해 클락 목사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하며 그에 대한 자료를 얻었다. 3·1운동이 지나간 뒤 한국 청년들 사이에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를 통해 애국 운동을 하려는 의욕이 더해지자 1921년 2월 5일에 한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를 받은 안동읍교회 청년들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면려운동의 표제에 깊은 공감을 가지고 조직에 참여, 회장으로 권중윤 씨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안동지방에서 면려운동은 새로운 활기를 띠는 사역으로 평가받았다.

한국교회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면려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안동에서 시작되자 잇따라 경북 각지에서 면려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21년 6월 7~9일에는 경북연합 지방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게 됐다.

면려운동이 확산되자 1921년 제10회 총회에서는 면려 청년회를 전국 교회마다 설치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그 후 1923년에는 약 200여 교회에서 면려회가 생겨났으며 1924년 8월에는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기성회를 조직했고, 1924년 12월 2~8일에는 서울 정동의 피어선 성경학원에서 창립총회 겸 제1회 면려회 친선대회를 열었다.

이후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사회계몽운동, 사회개혁운동, 선교운동 등을 하면서 사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아동성경학교와 성경 구락부를 통한 계몽 활동은 학생들을 위한 전도와 신앙교육에 중점을 맞췄다. 또한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폐창운동 등으로 신앙과 생활을 동일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절제운동은 술,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으로 맹렬하게 일어났으며 물산장려운동은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 두 운동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교단의 분열 등으로 위기를 겪었던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전국청장년면려회연합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지금까지도 사회봉사와 복음 전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해외선교, 사랑의마라톤, 비전트립, 의료봉사, 군선교, 연탄배달, 기도운동 등 다양한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며 이제 63회기를 맞아 건강한 기독청년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있다.

개혁주의 여성들의 힘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13년 만에 평양 널다리골교회에 최초의 개교회 여전도회가 창립된 것이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시초가 됐다. 목적은 물론 ‘전도와 선교’였다. 교회 여성들은 당시 난국에 처한 우리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길은 복음 전파임을 깨닫고, 더욱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 힘을 모아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개교회 여전도회로 각기 활동을 시작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지방연합회와 노회연합 여전도회가 조직돼 전도의 불길은 뜨겁게 타올랐다. 국내전도뿐만 아니라 외지선교에까지 눈을 뜨게 된 교회 여성들은 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고 장로교의 해외선교 사업을 돕기 위해 전국여전도회연합회를 구성하게 된다.

1926년 9월 11일, 제1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됐을 때, 여전도회 대표들은 그곳에서 전국연합회 조직을 위한 발기회를 갖기로 결의했고, 16회 총회에서 허락을 받아 창립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1928년 제17회 총회에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조직을 승인받게 된다. 창립총회는 1928년 9월 9일 대구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11개 연합회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열렸으며 이루이시 선교사가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초대부터 4대 회장까지는 선교사들이 회장이 되어오다가 5대에는 평양고등성경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한영신 씨가 한국인으로 첫 회장이 되면서 그 후로 한국 여성들이 사역을 주도하게 됐다. 조직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목적은 ‘그리스도 복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총회 내외지 전도부 사업을 찬조하는 것’이었다. 그 후 여전도회는 개교회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도록 권장하는 한편 전도 집회와 부흥 사경회를 개최하고, 부인성경야학이라는 이름으로 밤마다 모여 성경공부를 실시하기도 했다. 여성의 90% 이상이 문맹이던 그 당시에 부인을 위한 야학을 하는 것은 당시 정치적, 사회적 제약을 받던 여성으로서 크고도 의미 있는 사역이었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세계로 눈을 돌려 첫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는데, 1931년 9월 11일 중국 산둥성으로 파송된 김순호 선교사다. 이후에도 남만주, 북만주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며 복음 전파에 진력을 다하였고, 일제의 탄압 등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열정과 지혜로 그 순간을 극복해나갔다.

1946년 재건총회로 모인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한국전쟁과 장로교 분열 등을 거치면서도 전도와 선교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대치동 총회회관을 지을 때에는 당시 여전도회관을 팔아 헌금하는 등 총회의 일에도 적극 협조했다.

올해 76회기를 맞은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지금까지도 선교와 구제에 앞장서며 31개의 미자립교회 보조, 교도소 및 복지재단 전도, 18명의 협력선교사 파송, 46명의 군목 활동비 지원 등을 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AX국에 직업훈련고등학교를 세우고 탄자니아에 제자훈련학교를 완공시키는 등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기도한국이나 통일교대책위원회를 후원하면서 총회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래를 위한 헌신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전국주일학교연합회는 1955년에 창립총회를 열고 처음 발족했다. 각 노회별로 주교연합회가 조직됨에 따라, 이를 전국 단위로 모으는 연합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주일학교 대회가 열린 적도 있었으나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라 역사기록이 되지는 못했다.

1955년 9월 16일 영락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전국주일학교연합회는 초대 회장으로 경기노회 고찬영 장로를 선출하고 본격적인 사역에 나섰다. 창립총회 때는 18개 노회(방청 2개 노회 포함) 대표 53명이 참석했고, 총회 교육부 임원진들이 임시의장과 서기를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는 창립부터 의욕적인 사업과 행사를 진행했다. 중요 사업은 교사 강습회, 주일학교 회보발간, 교사웅변대회 등이었으며 교사배지 제작 및 보급, 하기학교 지도자 강습회 후원과 개최에 역점을 두었다.

1956년 4월 3~8일에는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를 대구 계성교회에서 열고 교사들의 질적 향상과 단합, 친교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같은 해에 발행된 주일학교 연합회 <회보>는 문서 선교활동과 전국주교 활동 홍보에 큰 역할을 담당한 기관지였다. <회보>는 1963년엔 <주일학교 교지>로, 1964년엔 <주일학교 교사>로 제호가 변경됐으며,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대표:강정훈 목사)이 인수한 뒤 현재까지 <교사의 벗>으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교육과 교사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 노력해온 전국주일학교연합회는 지금까지도 모범어린이 표창, 20년 이상 근속교사 표창 등을 진행하며 학생과 교사들을 격려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매년 열리는 전국대회는 성경고사, 암송, 쓰기, 찬양, 율동, 워십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생들이 기량을 발휘하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그 수준이 향상되어 학생들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중이다.

57회기를 맞은 전국주일학교연합회는 주일학교의 부흥과 교사 교육은 물론, 어려운 국가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방문하는 등 해외에도 눈을 돌리면서 전 세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내적으로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외적으로는 복음전파와 사회운동을 위해 헌신한 평신도는 한국장로교가 100주년을 맞이하며 부흥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숨은 영웅들이다. 지금까지도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평신도운동은 앞으로의 100년에서도 다양한 역할로 한국교회의 발전을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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