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기독교성장 주춧돌-세계선교

 
‘10만 한국인 선교사 시대’ 견인한다

1913년 첫 해외 파송…세계 2번째 규모 GMS, 100개국 2134명 파송

▲ 총회 선교부는 1998년 GMS로 확대 개편해 세계적 교단선교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사진은 당시 GMS 창립기념선교대회 모습.
“선교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다.”

1907년 독노회 조직 때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채택한 결의다. 이 결의에 볼 수 있듯 한국장로교회는 태동부터 선교정신이 뚜렷했다. 복음을 전해준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초대 지도자들의 자원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 같은 선교정신 덕분에 첫 조선인 목사들 중 한 명을 당시 외지였던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한국교회 선교를 대표하고, 세계선교를 이끄는 선교회로 성장하는 은혜를 얻게 됐다.

1907년 이기풍 목사 제주도 파송, 1908년 한석진 목사 일본 동경 파송, 1909년 최간흘 목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파송은 한국인 유학생과 이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만주 이주민들을 향한 선교에도 힘썼다. 1901년부터 1945년까지 총회가 만주에 파송한 공식 선교사만 100명 이상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중국인들보다 한국인들의 수가 세 배나 더 많은 상황이었다. 만주 선교에 힘쓴 결과 6개 노회가 조직되고, 1941년에는 한국과는 독립된 총회까지 조직되었는가 하면 평양신학교를 대신하는 신학교도 운영됐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선교사 파송은 1913년 이뤄졌다. 1912년 첫 총회 석상에서 중국 산동성 선교를 결의한 장로교 총회는 이듬해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를 산동성으로 파송했다. 외국 땅에서의 첫 번째 타문화권 선교였다. 그 후 45년 동안 8명의 목사와 한 명의 여전도사 등 9명의 선교사가 파송됐다. 이외에도 여러 명의 의사와 교사 등 평신도 선교 조력자들이 산동 선교에 협력했고, 이 결과 산동 선교 사역은 근대 중국 교회사에 괄목할만한 기록으로 남았다. 당시 선교사들의 수고로 키워진 교회들이 래양노회를 조직했는데, 래양노회는 당시 중화 기독교회 126개 중 하나로 기록됐다. 이들 중에 특히 이대영 선교사는 중국 내 전란과 일본의 압제 가운데서도 27년간 선교지에서 충성했으며, 1937년 마지막으로 파송된 방지일 선교사는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때가지 선교지를 지키다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강제출국 당한 마지막 선교사가 되었다.

1938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 장로교회 해외선교는 침체기를 맞았다. 1937년 방지일 선교사와 만주에 최형주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1955년까지 전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없었다. 일제의 박해와 신사참배 결의사건 논란,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선교에 앞서 한국교회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단은 교단 분열 등 어려웠던 시기를 가까스로 추스르고 1955년 총회에서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함으로 다시 한 번 교회의 본질이 선교에 있음을 확인했다. 1956년 최찬영, 김순일 목사를 태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1957년에는 계화삼 목사를 대만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어 1960년대에 들어서도 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선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교단은 한국교회의 선교의 불길을 이끌기 시작했고, 선교지를 여러 대륙으로 확장해 갔다. 아시아를 필두로 남미, 북미, 유럽, 호주, 아프리카까지 선교사들이 속속 파송됐는데,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흩어져간 한민족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이들 한인교회를 거점으로 이방세계로 복음을 확장해 갔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선교사들이 직접 현지인을 상대로 교회개척과 여러 형태의 선교 사역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현지 선교기지 구축과 전략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특별히 1964년부터 1980년까지는 선교환경이 거의 조성되지 않은 시기였다. 외화송금 액수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1년짜리 일반여권 발급 절차도 9개월에서 1년 이상이 소요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선교훈련원도 없었고, 선교지에 어떻게 정착하며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에 대한 정보조차 없어 선교사들의 제반 여건은 열악한 상황이었다.

1980년대는 교단선교의 확장기였다.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동안 우리 교단 선교부는 총 144가정 239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교단은 늘어나는 교단 선교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선교부에서 상설기구로 선교국을 설치함으로 선교 행정의 선구적 길을 개척했다. 1983년에는 총회선교훈련원이 세워져 영어와 일부 선교학 과목을 곁들인 단기선교훈련과정을 시작했다. 1980년 후반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공산권의 문이 열리자, 교단은 옛 선교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동구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1990년대부터는 더욱 성숙된 교단 선교를 위해 선교정책을 발전시켜 가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은 지역마다 지부를 조직하고, 여러 모양으로 선교전략을 개발시켰다. 교단 선교본부에서도 해외선교위원회를 조직해 운영하고 선교훈련원을 확장하고 정비해 효율적인 사역을 도모했다. 또 세계적인 선교단체들과 협정을 맺어 세계 복음화의 공동 전선을 펴기도 했다.

이 같은 선교전략과 정책의 일환으로 1996년 교단 총회는 선교 사역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선교부의 확대 개편의 필요를 절감하며, 이를 연구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총회에서 교단 내 선교기구들을 통합하고 교단 선교부를 확대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세계선교회’(GMS)를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98년 11월 18일 왕성교회에서 GMS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새로이 기구를 조직했다.

1999년 10월에는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월문리에 위치한 구 바울의 집을 GMS선교센터로 인수해 정착함으로써, 교단 선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선교전략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와 2000년 제3회 GMS 이사회 총회에서는 이사회 조직을 전문위원회와 지역위원회로 구분해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부 조직도 개편해 2004년에는 본부장 1인 중심의 단일구도에서 3부서장 구도로 변경해 시행했으며, 2011년 이사회 총회는 다시 본부장 직위를 신설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서 2009년에는 효율적 팀 사역과 연합을 위해 지역선교부 제도를 통과시켰다.

2005년 9월에는 총회의 개혁교단과의 합동으로 GMS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구 개혁교단 선교사들과의 연합으로 GMS는 총 91개국 172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국내 최대 교단선교부가 되었으며,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주도적인 선교단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위치에 서게 됐다.

2000년대 들어 GMS 산하기관도 속속 만들어져, 2006년에는 사회복지법인 GMS사회복지재단 설립인가를 받고, 산하에 GMS화성요양원과 GMS화성복지센터를 설립했다. 또 2009년에는 GMS NGO법인으로서 (사)한민족사랑네트워크를 설립했으며, 같은 해 GMS 부설기관으로 조동진선교기념관을 개관했다.

2000년대에 들어 대규모 선교대회도 열렸다. 2003년 GMS 세계선교대회와 2006년 GMS 국제화포럼이 열렸으며, 2011년에는 안산동산교회에서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했다. 2011년 세계선교대회는 교단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첫 번째 대형집회로 100개국에서 온 270여 명의 선교사들과 파송교회, 후원자들이 선교의 부르심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본 대회에 앞서 25개 지역별 선교대회를 개최해 선교 분위기를 교단 전 교회로 확산시켰다.

2011년 9월 현재 GMS는 100개국에 1170가정, 2134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국내 최대이자,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단선교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주선교의 현대적 의의

오늘날 ‘협력선교’ 모범이 되다


이기풍 목사와 동역팀들의 복음 사역은 오늘날 제주도 선교에 큰 공헌을 끼쳤을 뿐 아니라 의의 또한 매우 크다.
제주도 선교는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 전체에서 최초로 시행한 타문화권 선교였다. 독노회 설립과 함께 안수 받은 일곱 명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
제주도 선교는 또 오늘날 한국교회 해외선교 사역에서 협력선교, 팀선교, 평신도선교, 부부선교, 독신선교, 학생선교 및 능력선교의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제주 선교는 협력선교의 좋은 본이 되었다. 이기풍 목사가 교단 후원으로 파송된 이후, 평양노회 여선교회는 이선광 전도사를 후원해 선교사로 파송했다. 또 평양남학교와 학생선교회는 학생사역자 김현철을 제주도로 보내 선교비를 전담했다. 이기풍 선교사팀은 또 미국 남장로교 소속 목포선교부의 선교사들과 협력해 의료선교를 하기도 했다.
제주도 선교는 또 해외선교에 대한 인식의 발전을 가져왔다.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 설립에 맞춰 중국 산동성에 순수 해외선교를 시작한 후 제주도 선교를 ‘내지선교(Home Mission)’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1913년부터 전라노회로 위임해 전담토록 했다. 이는 곧 한국 장로교회의 해외선교와 국내 전도에 대한 분명한 개념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