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기독교성장 주춧돌

 
강력한 부흥운동 중심에 ‘말씀’ 있었다

사경회·부흥회 통해 얻은 삶의 동력, 사회문화운동에 열정적으로 기여


서방종교인 기독교가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사회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뿌리를 내리고,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한국기독교 성장의 주춧돌이 되었다.

초기 복음전래의 일련의 과정에서 나타나듯,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성경번역으로 시작해 성경을 반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말씀을 통해 변화된 초기 신앙인들이 목숨을 걸고 말씀을 통해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이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자립(自立)’, ‘자전(自傳)’, ‘자치(自治)’로 알려졌으나, 그 근간은 ‘성경공부’에 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탐구하는 성경중심의 선교정책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인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10개 조항 가운데 세 가지가 성경공부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두 번째 조항에는 성경이 모든 선교정책의 근간이 되게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교회 성장견인1 사경회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교회 부흥의 근간이 된 ‘사경회’운동을 태동시켰다. 사경회(査經會)란 사전적 의미로 ‘일정한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 공부를 하거나 성경에 대한 강의를 듣기 위하여 모이는 모임’으로 정의한다.
초기 한국의 모든 교회가 사경회를 열었으며, 교인들은 1년에 한두 차례 열리는 지방 또는 도 사경회에 참석하는 것이 의무이다시피 했다. 사경회에 참석하면 보통 1~3주 동안 매일 새벽에는 기도하고,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받았으며, 오후에는 전도하고, 저녁에는 전도한 이들을 초청해 전도집회를 열었다.
철저한 말씀에 대한 연구,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간구하는 기도,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전도는 사경회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사경회가 한국교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인 영적각성운동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대표적으로 사경회의 산물로 보고 있다.
원산부흥운동은 하디 선교사가 인도한 사경회 성격의 1주일간의 기도회에서 나타났고,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겨울 도 남자사경회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백만인구령운동 역시 사경회에서 가진 전도의 확산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에 놀라운 급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사경회는 한국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례로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미국 북장로교의 경우, 1908년 22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한국에 보강됐고, 1909년에는 14명이 추가로 보강됐다. 초등학교도 115개에서 606개로 증가했고, 주일학교 학생수가 1만 7894명에서 8만 7117명으로 증가했다. 1908년과 1909년 사이 6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아 순수 27% 증가세를 보였다. 또한 약 1000개 교회에서 2만 5000명의 세례교인과 전체 11만명의 교인이 출석할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한국교회 성장견인2 부흥회

1920년대 한국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로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당시 저명한 부흥사들이었다. 3·1운동 이후 민족이 살 길이 복음화라는 사실을 체득한 이들은 기독교 민족운동을 부흥운동을 통해 승화시켜 나가도록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길선주 목사는 부흥 목회의 선구자로서 장대현교회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목회활동과 구국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1911년 105인사건 때에 수난을 당하였고,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선 일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북간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사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김익두는 한때 난봉꾼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1919년 10월 강동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신유은사를 받은 뒤부터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1950년 10월 14일 공산군에 의해 피살되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다. 그는 2만 8000여 회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1만 명을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이들을 통해 일어난 부흥운동은 국민들이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도전과 일본의 압제에 좌절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


한국교회 성장견인3 사회문화 운동

3·1운동은 복음전파와 복음의 순수성 회복 못지않게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소홀할 수 없다는 본연의 사명을 재확인시키는 전기로 작용했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의식은 농촌운동, 진흥운동, 절제운동 등과 같은 사회계몽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청소년운동, 주일학교육성과 기독교 교육, 기독교문화사업, 사회복지사업 등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절제운동’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사회계몽운동이었다. 192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파송받은 틴링(C. L. Tinling)에 의해 시작된 절제운동은 금주·금연과 공창 폐지운동을 주도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과 평양으로 시작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물산장려운동’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운동이었다.
3·1운동 이후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진흥운동’은 한국교회와 사회를 갱신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흥운동은 1919년부터 1926년,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진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영적각성 및 부흥운동이자, 교회 주일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청소년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YMCA, YWCA, 감리교의 엡윗청년회, 장로교의 청년면려회, 성결교의 신생청년회 등이 청소년운동을 주도했다. YMCA는 청소년들에게 기술학교를 세워 각종 기술을 보급했고, 야구나 농구 등을 통해 국민보건과 운동기술 보급에 있었어도 개척자 역할을 했다.
1922년 조직된 YWCA는 수양회, 하령회, 금주금연, 생활개선, 여성지위 향상, 공창폐지, 물산장려 등을 통해 단순히 신앙을 넘어 사회복지와 문화사업을 아우르는 운동을 전개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소외된 이웃을 보듬는 일에도 기독교가 앞장섰다. 고아, 나환자, 폐결핵환자를 위해 고아원과 수용소, 병원 등을 설립운영하며 사회복지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은 한국교회가 민족과 사회와 문화를 선도해야 할 책임을 인식하게 했다. 또한 남녀평등사상, 서양교육 확산, 신분제타파, 봉건체제 타파, 도덕 및 윤리의식 고양, 여성 지위 향상, 서양의학 발달, 한글 저변확대 등에서 보듯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컸다.

초대교회와 한국교회 부흥의 공통점

복음 생명력·내면적 성장 같았다


초기 한국교회에 일어난 부흥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모습과 닮은 점이 많다.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받은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확산과 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한국교회 역시 일제치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평양대부흥운동 등을 통해 놀라운 성장과 복음전파가 이뤄졌다. 생명력 있는 복음은 어떠한 억압과 핍박에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초대교회와 한국교회 초기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회환경적 요소 뿐 아니라 성장의 내면적인 부분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초대교회 부흥과 성장은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듯이, 사도들의 권위있는 가르침과 기적, 믿는 사람들의 모범된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
한국교회 역시 사경회를 중심으로 말씀과 기도, 전도에 매진했고, 믿는 사람들이 모이기에 힘썼으며, 각종 사회문화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또한 놀라운 신유의 이적을 통해서도 살아있는 하나님이 증거됐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는 전무후무한 대부흥의 역사를 맛보았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나 초기 한국교회에서 보듯, 교회의 성장은 인위적인 노력에서 이뤄진 결과물이 아니다. 원초적인 복음을 듣고, 전하는 일을 통해서, 여기에 일반인들에게 칭송을 받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부흥을 맛보았고 성장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성장 정체에서 감소라는 뼈아픈 경험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원초적인 복음에 반응한 초기 한국교회를 ‘멘토’ 삼아, 다시금 이 땅에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휘몰아치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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