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주요 인물 40인

 
한국 장로교회 주요 인물 40인(예장합동 기준)

주요 인물 40인 어떻게 선정했나
신앙 선배들의 땀과 눈물과 피가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이만큼 성장했다. 믿음을 지키고 간 모두가 승리자며 기념자다. 그러나 이들 중에 특별한 분들을 선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번에 선정된 인물은 총회 산하 각계의 조언과 기관들의 추천을 받아 1차적으로 123명을 추렸다. 증경총회장을 중심으로 자문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만 생존자는 평가가 불가하다는 조언이었다. 내부회의 등을 거쳐 56명을 뽑았으며, 끝에 최종 40명을 선정했다.

[외국인 선교사]----------------------------------------------------------

조선 땅 첫번째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영국 웨일스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로 런던선교회에 들어가 1863년 청나라에 파송 받았다. 그러나 상해 도착 후 곧 아내를 병으로 잃고, 선임 선교사와 의견충돌로 1864년 선교회를 사임했다. 그 후 중국어 성경을 다량 구입해, 조선에서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의 안내로 1865년 황해도 주민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나누어주며 한국말을 배웠다. 1866년 미국 선적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중국어 성경을 나누어주었는데, 그만 배가 좌초돼 조선인 수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선원들은 전부 사살 당했으며, 토마스 목사도 양각도에 연결된 쑥섬 숲속에서 참수 당했다. 조선 땅 첫 번째 순교자로 당시 나이 27세였다.

의료선교 ‘광혜원’ 열다

알렌 선교사(Horace Newton Allen, 안연, 1858~1932)

미국에서 태어나 웨슬리언대학 신학부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해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파송 받았으나, 동료와의 갈등, 선교 경험의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84년 9월 20일 한국 주재 해외공사 부속의사 자격으로 입국했다. 같은 해 12월 4일 갑신정변 때 수구파 민영익을 치료해 준 것이 계기가 돼, 왕실의 도움을 받게 되고, 1885년 4월 10일에는 광혜원을 개설했다. 광혜원은 의술로 조선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좋은 도구가 됐을 뿐 아니라, 입국한 선교사들이 선교를 준비하는 거점으로도 사용됐다. 황실과의 지나친 밀착관계로 동료 선교사들과 마찰을 빚다 1887년 선교사직을 사임했으며, 1890년 의료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성경번역·교육사업 진력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1859~1916)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으며 미국으로 이민 가 뉴욕대학과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첫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함께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특별히 성경번역과 선교확장, 교육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다.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해 성경번역사업에 몰두했으며,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조선 선교에 나서는데 직간접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경신학교(1885)와 연희전문학교(1899) 설립에 힘썼으며, 1887년에는 자신의 집에서 지금의 새문안교회라 불리는 ‘장로교 정동교회’ 설립예배를 드렸다. 1912년 제1회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됐다.

성경 통신강좌 시작하다

스왈렌 선교사(William L. Swallen, 소안론, 1859~1954)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 총회성경통신대학의 시초인 성경 통신강좌를 시작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비롯해 수많은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시하기도 했다. 1892년 조선에 도착했으며, 1901년에는 평양으로 거점을 옮겨 1932년 73세의 나이로 명예 은퇴할 때까지 평양을 무대로 전도 및 문서선교에 생애를 바쳤다. 1901년 합동공의회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은퇴 후에도 성경번역 작업에 참여하는 등 한국 선교에 공을 들였다. 최초의 조선인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가 스왈렌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김익두 목사도 스왈렌 목사의 집회에 참석했다 기독교 신자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신학교 설립 큰 역할

모펫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t, 마포삼열, 1864~1939)

미국 매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1889년 한국에 파송되었으며, 1893년부터 1924년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와 제5장로교회를 맡았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순회 선교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평양을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평양신학교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1901년 자신의 집에서 평양신학교를 시작했으며, 1925년까지 평양신학교 교장과 평양숭실학교 교장(1918~1925)을 지냈다. 1907년 최초의 독노회가 설립됐을 때는 첫 노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11년에 105인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주동 인물로 지목을 받았으며, 1919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

헌트 선교사(Bruce Finley Hunt, 한부선, 1903~1992)

아버지 윌리엄 헌트(William B. Hunt, 한위렴)와 어머니 버다 헌트(Bertha Violet Finly Hunt) 선교사의 외아들로,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또래 조선 소년들과 격의 없이 놀면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서를 잘 알고, 한국어 솜씨도 어색하지 않았다. 191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8년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조선을 찾았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9월 제27회 총회 때는 신사참배 결의를 반대하다, 일본 형사에 의해 내동댕이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만주 하얼빈으로 들어가 3년간 26개처의 한국교회를 돌보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41년 10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1942년 6월 미국으로 강제송환될 때까지 9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교회지도자·목회자]-------------------------------------------------------

한국교회 전천후 일꾼

서상륜(1848~1866)

그의 이름 앞엔 늘 최초가 붙는다. 최초의 성경번역인, 매서인, 권서인이다. 백홍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1848년 7월 26일 평북 의주 출신인 그는 13세 때 조실부모하여 만주로 홍삼 장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31세 때 만주에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목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에게 구호 받은 것이 계기가 돼 예수를 영접했다. 몇 달 후 같은 선교회 소속 로스(Ross)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는 고향 친구인 이응찬, 이성하 등과 함께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전력했다. 1883년 성경을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의주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 솔내(松川)에서 한국 최초의 자생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웠다.

소래교회 건축 주도역할

서경조 목사(1852~1938)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는 한국 기독교에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다. 이들의 헌신으로 한국 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과언이 아니다. 서경조는 형 서상륜과 함께 한국 최초의 자생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웠다.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경조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렸으며, 그는 1896년 소래교회당을 건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뒤 황해도 장연·옹진 등지에서 사우어(Sharp) 선교사와 함께 복음전파를 했다. 1907년에는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길선주 등 6인과 함께 장로교 최초의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1910년에는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와 함께 새문안교회와 남대문교회, 그리고 고양·시흥·파주·교하·통진·김포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한국 장로교 기초를 놓다

한석진 목사(1868~1939)

“대한의 신학교 졸업학사 일곱 사람을 목사로 장립하고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라 하셨으니 이는 실로 대한국 독립 노회로다. 성부 성자 성신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세. 아멘.” 1907년 9월 예수교장로회 노회(일명 독노회)가 설립될 당시 한석진, 길선주 목사가 쓴 창립 노회록 서문 중 일부분이다. 이처럼 한석진은 한국의 장로교 기초를 놓은 사람 중 하나다. 특히 1909년 독노회는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경에 파송했다. 1912년 총회 설립 시 한석진은 서기에 선임됐다. 한석진은 복음전파 사역에도 힘썼다. 1893년 마포삼열이 평양에 선교사업을 위해 정착하면서 널다리(板洞)에 ‘판동’ 또는 ‘널다리교회’를 세웠다. 당시 한석진은 조사로 활약했다. 그 후 널다리교회는 1899년 장대현교회로 바꾸었다.

‘부흥 목회’ 선구자로 우뚝

길선주 목사(1869~1935)

부흥 목회의 선구자,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 길선주와 평양 장대현교회 그리고 1907년 평양대부흥은 불가분의 관계다. 1905년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와 장로 박치록에 의해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됐으며, 대부흥운동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다. 장대현교회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목회활동과 구국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했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숭덕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 때에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일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사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신사참배 반대 후 투옥

최봉석 목사(1869~1944)

1902년 삭주교회 설립자인 백유계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벽동읍교회에 조사로 부임하고 사역했다. 1914년 장로교 평북노회에서 만주지방 전도목사로 파송 받아 만주에서 14년 동안 전도활동을 했다. 1926년에 귀국해 평안남도 강동교회에 부임하였고, 다음해부터 산정현교회의 전도목사가 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계속했다.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공개적으로 이를 반대했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당할 때에도 ‘예수천당’을 외쳤으며 감방 안에서도 전도를 계속했다. 1944년 3월 1일을 기하여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하였고 4월 15일 병보석으로 풀려난 얼마 뒤 사망했다. 광복 후 1946년 산정현교회는 그의 순교기념비를 건립했다.

3·1운동때 민족대표로

양전백 목사(1870~1933)

평안북도 선천 출신인 양전백은 장로교 최초의 목사로 장립을 받았으며,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활동하는 등 교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1901년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조직 때 조사였던 양전백은 서경조, 김종섭, 방기창 세 명의 장로와 조사 송순명, 최흥서, 천광실, 고찬익, 유태연과 함께 참석했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선천북교회에 부임했다. 신성중학·보성여학교 등을 설립하였으며, 여러 곳에 양로원과 고아원도 세웠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1914년 부총회장에, 1916년에는 총회장에 선출됐으며, 1919년 3월 1일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포고문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50년간 신유부흥집회 인도

김익두 목사(1874~1950)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1900년 봄에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W.L.)의 ‘영생’이라는 설교에 감동하여 1901년 1월, 부인 및 어머니와 함께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졸업 후 신천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목회했다. 1919년 10월 강동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신유의 능력을 받아 그 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1950년 10월 14일 신천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난입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50여 년 동안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으며, 2만 8000여 회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1만 명을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유일한 ‘3선 총회장’ 되다

이자익 목사(1882~1961)

머슴 출신 3선 총회장, 대표적 청빈 목회자. 이자익은 경남 남해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했으나 조실부모하고, 17세 때 행상의 길을 나섰다.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고 조사로 일했다. 그는 법통으로 불렸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해주었다. 1924년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모인 제13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광복 후 1947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인 제33회 총회와 그 이듬해 1948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4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또 피선되었다. 이리하여 총회100년 역사를 통하여 유일하게 ‘삼선(三選) 총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서울 남산에 있던 장로회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노령의 몸으로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보였다.

농촌교회 부흥운동 전개

배은희 목사(1888~1966)

대구 달성 출신. 어릴 때는 한문공부를 했으나 1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방랑생활을 하던 중 기독교에 입교했다.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면서 그 안에 숭덕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는 한편, 달성·경산·청도 군 일대의 전도에 힘썼다. 신학교 재학 중이었던 3·1운동 때 학생시위의 경력이 있었던 그는 전주에서 민족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신간회(新幹會) 전주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교회 내에 유치원과 무산아야학을 개설하여 500∼600명의 아동들을 돌보았다. 1929년부터 신현창·유상백·강봉의 등과 함께 독신전도단(후의 복음전도단)을 조직하여 전라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농촌교회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했으며, 1951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정치활동도 했었다.

신앙지조 지킨 순교자

주기철 목사(1897~1944)

경상남도 웅천에서 태어나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하던 어느 날,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성령을 받고 1921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936년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그가 부임하기 1년 전부터 한국교회와 신학교를 괴롭혔고, 결국 평양의 숭실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폐쇄됐다.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기도 했다.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교인들에게 최후로 전했다. 이 설교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했고,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했으며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됐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불붙이다

한상동 목사(1901~1976)

1924년 박창근의 전도로 신자가 된 한상동은 1927년 가문에서 추방되고, 고향을 떠나 진주 광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933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7년에 졸업했다.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시작이 되었으며, 1939년 1월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 이 운동을 계속하던 중 마산경찰서의 퇴임 압력으로 교회를 떠나 무임목사가 됐다. 이후부터 부산·마산·밀양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조직적인 운동을 벌이다가 1940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51년 새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 고려파(예장고신)를 분립했다.

불꽃신앙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1902~1950)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해 아버지가 장로인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3·1운동에 가담한 죄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했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 애양원의 교회에서 봉사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해 1940년에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서야 출옥하였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나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해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총살당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통합 이탈시 사회 맡아

노진현 목사(1904~2002)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훌튼 박사가 설립한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칼빈의 정통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오사카 지역 공장지대를 돌며 노동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등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며 교토중앙교회와 오사카 니시나리교회에서 시무했다. 해방 후 고국을 찾아 YMCA 초대총무로 활동하면서 부산중앙교회를 개척했으며, 특히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부산을 찾자 구국기도회를 열며 나라와 교회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1958년 총회장에 선출되어 1959년 제44회 총회 시 예장통합이 이탈할 때 사회를 맡아 유명하다. 1976년까지 부산중앙교회에 시무했으며, 이후 예장합신 교단으로 분리해 나갔다. 2002년 소천 직전까지 예장합동과 합신간 교단합동을 모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행일치 실천한 ‘성자’

한병기 목사(1913~2004)

1939년 일본 관서대학교 법률학과와 1954년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평생 부산부전교회에서만 시무했다. 한 목사는 한국동란 후 부인과 1남 2녀의 가족을 남겨둔 채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54년을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수입의 전체를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단체, 양로원, 학교 등지에 기부하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한 마디로 청빈과 섬김, 정결한 삶을 통해 신행일치를 보여준 진정한 ‘성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 목사는 70세 정년제를 실시하기도 전에 몸소 자진 은퇴를 선언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교단발전에도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1978년 제63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1981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호남지역 목회자의 ‘거목’

정규오 목사(1914~2006)

“우리는 보수교단의 버팀목 하나를 잃었다.” 2006년 1월, 정규오 목사 장례예배에서 황승기 총회장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1914년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9월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48년엔 조선신학교 51인 신앙동지회 회장으로 그의 목회 인생의 첫 단추는 끼워진 셈이다. 같은 해 순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광동중앙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1955년 광주중앙교회에서 사역했으며, 1955년부터 숭일학교 이사장, 광주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65세에 자진 조기 은퇴할 정도로 모범을 보였다. 1965년 총회장을 지냈으며, 1979년 비주류측 이탈시 개혁교단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호남지역 목회자의 ‘거목’이라는 평가다.

교단사업 강력한 리더십

이영수 목사(1928~1987)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장로교총회신학교를 졸업했다. 대전중앙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총회신학교 이사장, 1984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대회 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통일찬송가> 편찬 때 보수교단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데 일익을 감당했으며, 중부신학교(현 중부대학교)를 설립, 교육에도 열정을 보였다. 1980년대 예장합동 교단을 좌지우지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목사는 강한 이미지의 정치 스타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총회회관 건립 등 굵직한 사업을 전개하는 등 교단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도 회자되고 있다.

제자훈련에 평생 바쳐

옥한흠 목사(1938~2010)

경남 거제 출신으로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하여 평생 제자훈련을 통해 헌신적인 평신도 지도자 양성에 전념해 왔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그의 사역 결정체로서 제자훈련을 교회에 접목시켜 한국교회는 물론 전 세계교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옥 목사는 사역의 전반기를 제자양성에 두었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교회갱신과 연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장합동 목회자중심의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와 초교파적인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조직하여 교회개혁을 끊임없이 주창했다.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직분을 65세에 내려놓고 리더십 이양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귀감이 되었다. 최근 추도 1주기를 맞아 그의 제자훈련과 교회연합은 한 영혼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살린 진정한 교회운동이라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신학자]---------------------------------------------------------------

대표적 보수개혁 신학자

박형룡 목사(1897~1978)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한국교회 쇄신에 앞장선 개혁자로 손꼽히고 있다. 박 목사는 평양숭실대학교 우등생으로 졸업한 뒤 1923년 중국 금릉대학교와 1926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남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변증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1933년 루이스빌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귀국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일본 동경으로 피신하여 성경주석에 집필하다가 만주 봉천으로 자리를 옮겨 동북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1947년 다시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수로 취임한 뒤 교단 내부문제로 사임하고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고, 1953년 총회직영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1972년 은퇴한 뒤 저술에만 전념했으며, 12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은 성경의 무오성과 문자적 영감을 확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빈의 신학을 고수하는 보수 정통신학자로서 평가는 일관되나 신학교 부지 문제로 불거진 삼천만환 사건 등으로 볼 때 행정력은 미흡했다는 평이다.

총신대 설립 결정적 역할

명신홍 목사(1904~1975)

명신홍 목사는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 칼빈신학교, 비브리칼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콜럼비아대학교에서도 문학석사를 받아 학위만 4개에 달한다. 1946년부터 11년간 대구서문교회에 시무할 당시 교인이 3000명에 달해 메가처치의 ‘위용’을 보였으며,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만 48세로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최연소 총회장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박형룡 목사가 연루된 신학교 부지 사건에 휘말리자 혼자 고군분투하여 신학교를 지켜냈으며, 특히 예장통합 이탈 후 신학교 재건을 위해 홀로 모금에 나서 암투병 중에도 4만 달러를 모금해 온 일화는 유명하다. 명 목사는 총신대를 설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자립의 기틀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명신홍 목사의 유해는 그동안 성남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2006년 사모 차득실 여사가 있는 미국으로 옮겨 합장되었다.

칼빈주의 체계화에 기여

박윤선 목사(1905~1988)

평북 철산 출신으로 9세 때 사서삼경의 본문과 주해를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다. 평양숭실대학교 시절 전도대를 조직하여 기도운동을 펼쳤으며 지방순회까지 실시했다.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 메이첸 교수의 지도아래 신약학을 전공했다. 1939년 만주 봉천에서 오가황교회를 시무하다가 만주신학교 교수로 봉직했으며 해방 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봉사했다. 1963년 총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1974년까지 봉직하다가 1979년 다시 총신대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여 학장서리를 지냈다. 박윤선 목사는 초대 교회의 선교사들의 신학을 이어받아 개혁주의 신학을 확고히 다진 가운데 한국교회에 칼빈주의를 소개하고 체계화 하는데 기여했다. 고신대, 총신대, 합신대 등지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후학들에게 칼빈의 개혁주의를 소개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40년간 각고를 쏟아 펴낸 전 20권의 주석과 각종 논문 또한 일관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기술하여 업적으로 남아있다. 1979년 비주류측 이탈로 설립된 합동신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총신대 기틀 다진 ‘스승’

김희보 목사(1918~2002)

평북 철산에서 출생한 김희보 목사는 정주 오산고등학교와 동경척식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동란 후 총회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59년 미국 링컨대학교와 칼빈신학교 대학원, 임마누엘 대학원을 수료하고, 1972년부터 9년간 총신대학교 학장으로 헌신했다. 김 목사는 총신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총신의 기틀을 다지고 세계적인 보수신학의 기초를 세우는데 큰 업적을 남겼으며, 호소력 있는 설교는 후학과 후배 목회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은퇴 후에는 줄곧 성실교회 협동목사로 시무해 왔다.

개혁신학 토대를 놓다

김의환 목사(1933~2010)

1933년 전남 장흥 출생인 김의환 목사는 1962년 미국 칼빈신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으며, 템플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총신대학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강의하며 <도전받는 보수신학>, <개혁주의 복음신학집>, <현대신학개설> 등 많은 저술을 펴내기도 했다. 미국 나성한인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95년 총신대 총장을 제의받고 4년간 봉사했으며, 2002년부터 역시 4년간 칼빈대학교 총장을 맡은 후, 성복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한편 김의환 목사는 한국에 개혁신학의 토대를 놓은 학자라는 평가와 함께 선교에도 주력하여 교회를 건강하게 부흥시킨 목회자로 인정받고 있다.

[해외선교·특수선교]-------------------------------------------------------

뚝심 강한 열정의 전도자

이기풍 목사(1865~1942)

새뮤얼 모펫 선교사가 평양에 왔을 때 돌을 던져 집 기왓장을 부수고, 평양 거리를 거닐던 모펫 선교사를 때려 거꾸러뜨린 불량배였다. 청일전쟁으로 피난 갔다가 예수를 믿게 되고 1896년 스왈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스왈렌 선교사와 같이 지방으로 다니며 전도에 힘썼다. 그의 전도열에 탄복한 모펫 선교사는 그를 매서인으로 지명하고, 얼마 후에는 조사로 세웠다. 모펫 선교사의 권유로 1903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1907년 첫 졸업생이자 다른 6명과 함께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총회로부터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0여 년 동안 선교에 헌신해 한국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틀을 다질 수 있게 했다. 1921년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산동 선교 전성기 이끌어

방효원 선교사(1886~1953)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홍승한과 함께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사병순, 김영훈, 박태로 등 1기 선교팀이 와해된 직후였다. 방 목사 등은 산동성 내양현 남관에 본부를 두고 사역을 시작했으며 남관교회를 설립하였다. 1917년에는 선교구가 다섯 개 현으로 확장되고, 30여 교회가 개척되는 등 산동 선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31년에는 독노회인 내양노회를 결성하고, 중화기독교전국총회의 창립요원으로 기여했으며, 1935년에는 상해 한인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다시 상해에서 목회하다 1945년 귀국하여 선천 남교회를 시무하던 중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월남하였다.

한국대학생선교 개척자

김준곤 목사(1925~2009)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으며, 일곱 살 때 모친의 친척인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다.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으며, 1951년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7년 미국 풀러신학교 유학 당시 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CCC 사역을 시작할 권유받고, 귀국 후 1958년 11월 2일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이외 1966년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설립했으며, 1972년 춘천 성시화운동을 한국 최초로 시작했다. 1974년에는 연인원 백만 명이 모여 전도훈련을 받고 한국교회 부흥의 중요 계기가 됐던 엑스플로’74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80’세계복음화대성회, 84’세계기도성회, 엑스폴로’85 등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크게 기여했다.

40여 개 교회개척 힘써

조기술 선교사(1934~2011)

1983년 6월 GMS 선교사로 인도네시아에 파송 받아 교회개척과 현지인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특히 1987년부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병원과 교육 사역에 힘써, 1990년에는 수마트라 최초의 선교병원을 세웠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외국어대학교 등을 설립했다. 또 수마트라 전 지역에 4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장로회총회를 세우기도 했다. 2006년 총신대 총동문회가 수여하는 ‘자랑스러운 총신인상’과 연세대가 수여하는 언더우드선교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정년은퇴하면서 GMS 명예선교사로 재직했다. 2011년 2월 12일 바탐에서 노환으로 소천했다.

인도네시아 선교 구심점

서만수 선교사(1939~2009)

1970년 제55회 총회에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 받고, 1971년 술라웨시 마마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정식국교를 수립하기 2년 전이었다. 1972년 7월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를 세웠으며, 이후 수십 년 간 밀림과 오지를 돌며 순회선교를 감당해 384개 교회를 개척했다. 또 3000여 촌락에 십자가를 세울 비전으로 5년제 정규신학대학(STINT)을 운영하며 사역자를 양성했다. 특히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는 초창기부터 인도네시아 선교의 교두보는 물론 교민 사회의 구심점과 한인 2세 교육을 위한 한인학교 설립 등 선교와 민간외교의 중심지가 돼 왔다. 2009년 성역 40년을 맞아 GMS 최초로 원로선교사로 추대됐으며, 같은 해 9월 16일 자카르타에서 소천했다.

[평신도 지도자]----------------------------------------------------------

오산학교 세워 민족교육

이승훈(1864~1930)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상인의 길을 걸었다. 보부상으로 시작해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사업에 실패하자 낙향,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했다.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개교해 교장이 됐다. 오산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1911년에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 일에 정성을 다했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어 이 운동의 기독교 대표로 참가했다.

신사참배 거부 일생 바쳐

박관준(1875~1945)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보수주의적 신앙에 침잠하였고, 한의사로 활동했다. 1937년 신문에서 평양의 삼숭(三崇), 즉 숭실전문ㆍ숭실중학ㆍ숭의여중이 신사불참배로 폐교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읽은 뒤 신사참배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제와 합법적으로 싸워 한국교회를 구출하기로 결심했다.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권고했고 일본에 건너가 거물급 정치인들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1939년 일본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건의서를 뿌렸으며 즉시 붙잡혔다. 귀국 후에도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다 검속되어 6년간의 옥고 끝에 평양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는 처음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시작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기독교 민족운동 ‘거물’

조만식(1883~1950)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23세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1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 오윤선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그 후 신간회, 관서체육회, 을지문덕장군수보회,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등 다양한 민족사역에 헌신했다. 1945년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공산군의 평양 철수 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의료선교 모범이 되다

장기려(1911~1995)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경성의전 입학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40년 기독교 계열의 평양 기휼병원 외과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평양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가톨릭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51년 부산에 무료진료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했다. 1976년까지 25년간을 복음병원 원장으로 봉직하면서 1968년에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키고 영세민들에게 의료복지 혜택을 주기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 외에도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사역으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으며 각종 상과 훈장을 받았다.

기독실업인 운동에 헌신

백남조(1913~1988)

경상북도 성주 출생으로 1937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1953년 부산 부전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후 신망애 양로원 이사, YMCA이사, 유치원 원장, 평화중고등학교 이사, 경북 성주 성산초등학교 설립, 복음병원 이사,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부회장, 국제기드온 이사, (주)백흥섬유 대표이사 등 종교계, 교육계, 실업계에서 폭넓은 사회활동을 했다. 특히 백남조 장로는 1963년 7월 9일 결성된 전국 실업인동지회 회장을 맡고 부터 총회신학교 건축을 위해 동부서주 했다. 노모를 위해 집을 지으려고 모아 두었던 돈으로 1963년 11월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임야 1만 8000평을 단독으로 매입, 총회신학교 부지로 헌납했다. 1967년 5월 2일부터 1988년 9월 10일까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현 총신대학교) 초대부터 6대까지 이사장을 역임했다.

[여성 지도자]------------------------------------------------------------

여성 지도자 양성에 진력

김필례(1891~1983)

1907년 지금의 정신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정신여자중학교 교사와 교감으로 사역했다. 하령회를 조직하고 김활란, 유각경과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만든 뒤 총무가 되어 농촌운동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 후 여성운동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로 분열되자,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1927년 근우회를 조직했다. 1937년까지 광주시 수피아여자중학교 교감을 지냈으며, 각종 토론회의 강사로 활약해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와 YWCA 활동에 활력소 구실을 하였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47년 정신여자중학교 교장이 되어 여성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애국정신 함양 전력 다해

김마리아(1892~1944)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고 연동여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 1918년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2·8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귀국 후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했다.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됐다.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상해로 망명,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1923년 미국에서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별기획팀:강석근 부장, 정형권·조준영·박용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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