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변혁과 도약의 시대(1960~현재)

 
‘오직 복음’ 결승선 향해 매진하다

통합 이탈·이단 도전에도 교회 부흥 위한 선교사역 열정 잃지않아


▲ 예장개혁과 합동은 분열로 얼룩진 한국교회사에 중대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90회 총회에서 개혁측 총대들이 입장하고 있다.
예장합동에서 통합측이 이탈해 나간 후 총회는 오로지 교회부흥에 매진했다. 통합측은 병원, 학교, 출판사, 기도원 등 선교사들이 소유하고 있던 각종 기관들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지만, 예장합동은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 선교회의 지원을 한 푼도 받을 수가 없어 홀로 설 수 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의 지원없이 교단이 흔들리지 않고 그래도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한 복음 아래 열정을 가지고 목회자와 교회가 하나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교회부흥의 대표적인 예가 1962년 총회에서 결의하여 추진한 부흥운동이다. 이를 신호탄으로 1964년부터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주일학교 사업을 통한 백만신도운동 10개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제50회 총회에서는 국제적 강사를 초청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시를 순회하며 전도대집회를 개최키로 결정하기도 했다.

1964년 2월 22일, 서울 충현교회에서 출발한 목사장로기도회는 목회자들과 장로들을 하나로 묶어 교단의 정책과 방향을 총회차원에서 능률적으로 추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목사장로기도회는 교단의 일치와 화합을 도모하고 교단 개혁의 구심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다. 이렇게 예장합동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전도에 주력하면서 해외선교의 끈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신학교 재건에 박차

통합측의 이탈 후 총회가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은 신학교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백남조 장로의 헌금이 종잣돈이 된 신학교 재건은 박형룡 박사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기틀을 잡고, 박윤선 박사가 새로 총신에 부임하여 신학교육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특히 생명을 걸고 미국에서 4만 달러를 모금해 온 명신홍 박사의 헌신은 고귀하게 빛났다. 사당동에 부지 1만 8000평을 마련한 후 마침내 1967년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12월 개교 67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전에 고려파(고신)와 합동하고 다시 고려파가 환원하는 혼란도 겪었다. 고려파와 합동은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며 하나가 된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나 결국 신학교를 둘러싼 이사회 구성을 놓고 고신측 출신자들이 불만을 표출하며 분열해 나갔다. 그 정점에는 교권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장합동은 통합측이 이탈한 후에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서울 지역은 물론 경기 호남 경남 등지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은 1970년대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늘어나는 교세에 비해 목회자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으며, 각 지역의 특성과 교회환경에 맞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필요성도 급하게 제기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장합동은 총회설립 6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일만교회운동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거기다가 총회회관을 건립키로 하고 구체적인 모금방법까지 제시하여 전국교회에 협조를 요청했다. 1974년 11월 25일 500교회에서 500명의 대표들이 승동교회에서 모여 교단부흥의 기폭제로 떠올랐다. 일만교회운동 지도위원으로 당시 <엑스플로 74>를 성공적으로 이끈 김준곤 목사가 포함되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1974년 예장합동은 2300교회에 교인이 63만명이었다. 10년간 7000교회를 설립하면 1984년까지 일만교회는 거뜬히 달성할 것이라는 것이 운동본부의 기획이었다. 일만교회운동은 각 지역에서 불이 붙었다. 충현교회는 9개의 교회를 세우고, 온천제일교회는 3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2년 사이에 350여 교회를 개척하는 성과를 일구었다. 이어 1977년에 일만교회운동 10차년도 계획을 세워 교세를 4배로 부흥토록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비주류측 방배동 신학교 설립

①비주류측의 방해로 대구동부교회 총회 현장을 경찰이 지키고 있는 제64회 총회.
②총회신학대학교의 종합관을 헐고 새로 기초공사를 벌이고 있는 사당동 캠퍼스 모습.
③총회세계선교회 설립을 결의한 왕성교회에서 열린 제83회 총회.
④제86회 총회에서 총회임원 제비뽑기를 처음으로 실시하고 있는 광경.
교회부흥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시점에 예장합동은 예기치 않은 시련을 겪게 된다. 1975년 제60회 총회에서 일기 시작한 분열의 조짐이 가시화 되었다. 1979년 3월 소위 비주류측이 방배동 총회신학교를 설립하여 제64회 총회에서 이탈해 나갔다. 총회는 방배동 신학교를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즉각 권계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제64회 총회를 앞두고 비주류 측은 소위 ‘교단정화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회분열을 획책하였다. 결국 그들은 총회가 열리는 대구동부교회당에 모이지 않고 별도로 대동교회에서 모여 나름대로 총회를 조직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적인 격동과 사회적 불안이 게속되는 소용돌이 속에 예장합동도 부침을 계속했다. 한국교회는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 신학계를 주도하고 총회와 교회도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80년 총신대 졸업식에 이영수 목사와 김희보 학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1970년대에 불기 시작한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운동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지만, 교회에게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도 강하게 요구되었다. 교회가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고 빛과 소금의 사명이 무엇인지 자기성찰의 자세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교회가 개인의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제를 치유하는데도 앞장서야 한다는 인식도 대두되었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백주년기념사업에 온 정성을 쏟았다. 새찬송가와 개편찬송가로 나뉜 찬송가를 <통일찬송가>로 통일하여 발행하고, 한국기독교백주년선교대회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성공적으로 치렀다. 예장합동이 교계 연합활동에 차츰 모습을 드러낸 시기도 이때부터다. 예장통합과 기장 감리교 등 에큐메니컬 진영과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연합기구에 열심히 참여했다. 1989년 제74회 총회에서 예장합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가입을 인준하고 총회장은 대정부 대외관계에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도록 결의했다. 한국장로교협의회에도 적극 동참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 환경은 놀랍게 변했다. 그동안 거침없이 성장하던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되더니 급기야 침체에 빠지기 시작했다. 예장합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단으로 규정된 다미선교회 이장림의 종말론이 한 차례 파란을 일으켰으며, 류광수의 다락방 전도운동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이 밖에도 김기동의 베뢰아,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 평강제일교회 등도 정통교회의 분란에 정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단의 활개는 총회가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이단사이비에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해 주기도 했다.

해외선교는 총회의 ‘보배’

1980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외선교다. 총회는 1969년 양승만 선교사를 브라질에 파송하고, 차남진을 미주에 1971년에 서만수와 신홍식을 인도네시아와 태국에 각각 파송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시대를 열었다. 선교정책이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지만 예장합동의 선교사 파송은 타 교단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1998년 교단내 선교부로 있던 조직을 확대하여 총회세계선교회(GMS)를 설립하면서 세계 최고의 선교기관으로 거듭났다. 2011년 현재 총회세계선교회 선교사는 100개국에 2133명이 파송되어 있다.

이후 예장합동은 2005년 26년 만에 예장개혁과 합동을 추진하여 명실공히 장자교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예장개혁과 합동은 분열로 점철된 한국교회사에 중대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90회 총회에서 양 교단은 합동을 선언하고 그동안 분열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서로 사랑하면서 화합의 시대를 열어갈 것을 다짐했다.

총회 주요결의 내용

제45회(1960년)  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 합동키로
제47회(1962년)  <파숫군>을 신학교 기관지로 하다
제45회(1960년)  고신측 환원해 가다
제50회(1965년)  <기독신보> 인가받다
제56회(1971년)  타 교단과 강단교류:고려파, 예성, 기성
제45회(1960년)  총회신학교 이사회 개편(재단, 일반)
제58회(1973년)  타 교단과 강단교류 위반시 시벌키로
제60회(1976년)  일만교회운동 적극 추진키로
제64회(1979년)  방배동 신학교 불법집단으로 규정
제65회(1980년)  전국남전도회연합회 조직
제67회(1982년)  한국찬송가공회 조직
제45회(1960년)  총회산하 전국교회 유지재단에 편입키로 가결
제71회(1986년)  교회간의 거리 기존 500m에서 300m로 조정
제74회(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인준
제45회(1960년)  총회장 대정부 대외관계 자유로이 참여토록 허락
제75회(1990년)  70세 정년제 시행결의
제79회(1994년)  총회정책위원회 부활
제80회(1995년)  총회주일 실시키로 결의
제81회(1996년)  평강제일교회, 만민중앙교회, 혜성교회 등 이단집단으로 결의
제83회(1998년)  총회주일헌금을 세례교인의무금으로 변경 
제45회(1960년)  총회세계선교회(GMS) 설립
제85회(2000년)  총회임원선거 제비뽑기로 실시 결의
제87회(2002년)  사회법정 상습고소자 엄중 징계키로
제89회(2004년)  제비뽑기 선거제도 총회산하 기관 확대 실시
제90회(2005년)  예장개혁과 합동
제45회(1960년)  평강제일교회 이단성 재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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