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해방 후 장로교 분열까지(1945~1959)

 
예장통합 이탈은 장로교 최대 비극

‘신학사상 충돌’ 고신·기장 연이은 분열 이어 1959년 총회서 씻을 수 없는 상처 남겨


1945년 해방이후 한국장로교회는 급속도로 분열됐다. 당시 분열의 배경에는 나름대로 교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나 고려파의 신사참배 원인을 제외하고는 신학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기장은 에큐메니컬을 표방하는 김재준 목사와 보수신학의 거목으로 불리는 박형룡 박사측이 나뉘어 분열됐으며, 예장합동에서 통합의 분열은 WCC 에큐메니컬 문제로 발생한 것이 정설이다.

 
고려파(고신)의 분열

해방 이후 남한에는 조선신학교만 존재하고 있었다. 1940년 김재준 송창근 목사 등이 설립한 일종의 목사양성소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평양신학교의 후신이라는 의미에서 장로교 신학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946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1회 남부총회에서 교단 직영신학교로 인가를 받고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옥 성도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자에게 학교를 맡길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장로교의 분열이 싹트기 시작했다. 1946년 9월 20일 부산 일신여학교에서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박사가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전승하고 파수한다는 기치 아래 고려신학교를 출범시켰다. 고려신학교는 무인가 신학교인 셈이었다.

1950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와 조선신학교 문제로 비상정회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바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 동란기간이었던 1951년 5월 24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제36회 총회 속회에서 경남노회가 분열되어 교단 분립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소위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10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 조직을 선언하고 1956년 9월 20일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가 발족한다.
 

기장의 분열

1939년 개교한 조선신학교는 1946년 개최한 남부총회에서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1947년 4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소위 <51인 사건>으로 불리는 진정서가 제출되어 파란이 일었다. 김재준 목사의 신학에 정면으로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 김재준 교수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공방을 펼쳤다.

이사회는 김 목사가 성경유오설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같이하면서도 교수직에 대한 문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김 목사를 지지하는 조선신학교측이 신학 문제가 아닌 교권싸움이며 지방싸움이라고 주장하여 본질에서 벗어난 분열양상으로 치달았다.

결국 1948년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고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이 결의된다. 한 교단에 신학교가 두 개가 된 것이다.

전쟁 중에 열린 제36회 속회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동시에 취소했다. 그리고 대구에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신학교측을 지지하는 총대들의 비난이 거셌다. 1952년 4월 29일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의 징계는 하지 않고 조선신학교의 총회직영신학교 인정은 취소하기로 처리했다. 다만 김 목사는 경기노회에 일임하여 처리토록 했다. 그러나 정작 경기노회에서 총회의 지시를 실행하기 보다는 총회의 위헌을 성토하고 총회의 결정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문제가 더 어렵게 되었다. 뒷 배경에는 캐나다 북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남장로교의 지지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53년 대구서문교회에서 회집된 제38회 총회에서 결국 김재준 목사가 성경유오설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며 목사 면직을 결의하자 김 목사 세력이 1954년 동자동 한국신학대학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출범시킨다. 이것이 현재 기장이다.
 

예장합동에서 통합측의 분열

고려파와 기장의 상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분열되어 한국장로교회는 역사 속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다. 한국교회사에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해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기장과 분열 이후 총회 내에 일기 시작한 WCC 에큐메니컬 진영과 NAE 진영간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도 물론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입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가 개최되면서 세계교회연합운동은 가속화를 얻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보수파의 입장에서 교회연합은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다. 거기다가 WCC 총회에 참석한 자들의 보고가 극명하게 나타나 혼란이 빚어졌다. 1954년 미국 에버스턴에서 열린 총회의 참관인은 명신홍 김현정을 비롯한 3명이었다.

세계신학에 둔감했던 한국장로교는 급기야 WCC에 ‘이단성이 있다’는 소문마저 감돌면서 보수파의 결집을 강화하게 되었다. 보수측은 WCC를 반대하고 NAE로 뭉쳤다. NAE는 빌리그레이엄이 주도하는 청년신앙운동으로 확산되어 초교파복음주의 단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7년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2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은 계속 참가하되 교회합동에는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결국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에서 예상대로 총회개회 전에 경기노회 총대 자격문제가 불거졌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과 상의하여 11월 24일까지 정회를 선포했다. 그러나 WCC 지지파인 예장통합은 속회날짜를 기다리지도 않고 9월 29일 연동교회에서 젼격 회집하여 완전히 이탈해 나갔다. 한국장로교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을 안겨준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물론 예장합동은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모여 회무를 처리했다.

▲ 일러스트=강인춘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진실

‘에큐메니컬’, 뿌리 흔들다

‘3000만환 사건’ 주장은 역사 호도일 뿐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예장통합이 이탈한 1959년 제44회 총회 모습.
“현 총회의 정세 하에서는 회무를 원만히 진행하기 곤란하므로 11월 24일 화요일 오후 7시까지 정회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도록 할 것. (단, 계속 총회 장소는 서울 새문안교회당으로 할 것), 특별위원회를 원·부총회장과 증경총회장과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 당면한 문제를 수습하도록 하여 주실 것” -증경총회장 일동


1959년 9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으나 총대 문제로 총회가 개회되기도 전에 경기노회 총대 문제가 야기되어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증경총회장들과 상의하여 제시한 내용이다. 이를 총대들이 받아들여 정회를 선포했는데 연동측(통합)은 9월 29일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했다. 총회 소집 날짜를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총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11월 24일을 기다리던 예장합동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모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했으며, 이 문제를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각 노회에 수의하여 총 노회 수 및 투표 총수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가결했다.

지금도 통합측은 당시 3000만환 사건이 분열의 주된 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사를 호도할 수는 없다. 엄연히 에큐메니컬 문제가 장로교 분열의 정점이었으며, 예장통합은 이렇게 장로교 뿌리에서 이탈해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증경총회장인 전필순 한경직 목사는 정회를 제안해놓고 서울 연동교회에 참여하여 총회를 열어 장로교 분열의 오점을 남겼다. 연동교회 총회 사회자는 전필순 목사였다.

당시 해리 로즈 선교사와 감부열 선교사도 “1958년 9월 28일 세계교회협의회와 예큐메니칼 문제로 한국장로교회가 분열되었다”고 1965년 <한국장로교의 역사>에서 밝혔다.

1959년 제44회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사회를 보고 정회를 선포했으며, 후에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역시 노진현 목사가 속회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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