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총회 설립 후 해방 전까지(1912~1945)

 
거센 안팎 시련에 정통신학 수호 분주

일제 탄압·이단 도전은 정체성 확립 논쟁 촉발…1938년 굴욕적 신사참배 결의도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고종 황제 추모예배가 끝났을 때 3000여 명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비장한 목소리로 베드로전서 3장 13∼17절과 로마서 9장 3절을 읽었다. 이어 숭실학교 졸업생 정일선이 강단에 올라,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뒤를 이어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숭덕학교에서 마련한 태극기가 사람들에 손에 쥐어졌다. 온 회중은 일제히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후, 가두행진으로 들어갔다. 이내 평양 종로 거리는 우렁찬 만세소리와 감격의 눈물로 바다를 이루었다.

1912년 총회 설립 이후 장로교는 한국 개신교를 주도하며 놀랍게 성장했다. 장로교를 비롯한 개신교의 성장은 자연 일제에게는 경계의 대상으로 비춰졌다. 일제는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으로 개신교를 탄압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123명 가운데 98명이 개신교인이었고, 그중 89명이 장로교인이었다. 105인 사건은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장로교의 경우 1911년 14만 4261명이었던 전체 교인이 1912년에는 12만 7228명으로, 한 해 동안 무려 1만7000여 명이 줄었다. 이 같은 일제의 탄압은 선교사들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까지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과 통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부정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 3·1운동 실패 이후 민족의 울분은 일본에 대한 새로운 저항 이외 민족의 유일한 소망은 기독교 밖에 없다는 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1920년대 부흥운동을 일으킨 길선주(왼쪽), 김익두 목사.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는 전도에 힘썼으며, 특별히 독립운동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장로교회는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민족대표 33명 중 개신교인이 16명이었는데, 그중 이승훈 장로(정주 장로교회), 길선주 목사(평양 장대현교회), 양전백 목사(선천 북장로교회) 등 7명이 장로교회 지도자들이었다. 3·1운동으로 장로교 총회 산하의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시련을 겪었다. 1919년 10월 4일 제8회 총회 보고에 따르면 체포된 교인이 총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가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 체포된 자가 202명, 구속된 성도가 남자 2125명, 여자 531명, 매 맞고 방면된 자 2162명, 사살된 성도 41명이었다.

일제가 외적인 시련이었다면, 내적인 시련은 이단들과 자유주의의 도전이었다. 1930년대 한국 개신교회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37만 명의 교세로 성장하고 교회의 활동도 비교적 활발했지만, 이용도의 극단적 신비주의 운동과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신흥우의 적극적 신앙단, 그리고 자유주의의 도전으로 시련을 겪었다.

그중 1920년대 감리교로부터 조짐이 나타나던 자유주의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0년부터 1936년까지 매우 강한 칼빈주의적 입장이었다.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대부분 칼빈주의적, 청교도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정통보수신학을 고수하고, 성경해석방법에서 역사적 비평주의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성경유일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미국 교계에서는 정통신학을 흐리게 만드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 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간과하는 세대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이 일본과 북미 등에서 유학하고 온 신진들에 의해 주장되면서, 그간의 정통보수주의와 논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자유주의와 이단들에 도전에 대해 총회는 신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총회는 제도적인 교회를 비판하고 신앙 없는 쭉정이로 비유하며 성령운동을 펼친 이용도 목사를 1933년 총회에서 이단으로 결의했으며,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론에 대해서도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조선>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구독을 금지시켰다. 1934년 감리교 유영기 목사가 편집한 <아빙돈 단권주석>에 대해서도 제24회 총회는 주석편집에 참여한 장로교 목사들에게 해명서를 내도록 지시했고, 길선주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로교 교인들에게 이 책의 구독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아빙돈 단권주석>은 역사비평적 성경해석방법을 그대로 수용했으며, 집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자유주의와 이단에 도전은 총회에 성경주석 출판이라는 도전을 던져주었다. 감리교의 자유주의 주석인 <아빙돈 단권주석>을 반박하고, 장로교 보수신학을 견지하기 위해 정통보수신학에 근거한 주석 출판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에 그간 자유주의에 맞서 정통보수신학의 보루 역할을 했던 박형룡 박사가 1935년 총회 <표준성경주석>의 출판위원장을 맡으면서 교단의 신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서 운동이 시작됐다. 박형룡 박사는 “성경주석전집을 준비하는 사업은 100년에 단 한 차례 시도할 수 있는 사업”이라며 중요성을 역설했다. 총회에서 조직한 주석편집위원회는 칼빈신학교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주 각 지역 50여 명의 신학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집필자들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교리적 표준을 충실히 따르는 칼빈주의 보수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1937년 11월 욥기와 시편 주석이 완성된 후 주석 발간은 한국전쟁과 교단 분열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1964년 12번째 예레미야 주석 발간까지 이어졌다.

장로교가 신학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제는 용의주도하게 신사참배 준비를 완료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아예 국가예산에 신사조영비를 선정, 신사참배를 통한 일본 신민화 작업을 준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로교회는 교권을 둘러싼 교권 갈등과 이단, 자유주의에 대한 대응 등으로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자연히 교단 내 단결이나 결속이 약화되고, 1935년을 고비로 표면상 보수와 정통을 내세우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 일제의 신사참배 강압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킨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절개와 순교는 어둠 속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었다. 왼쪽부터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목사.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일제는 교회들에 대해 회유와 강압의 양면작전을 펼쳤다. 1938년 2월 조선총독부는 5월에 개최될 각 지방 노회에 시달하기 위한 신사참배에 관한 시정방침을 수립했다. 안타깝게도 회유와 강압에 의해 1938년 제27회 총회 개회 직전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신사참배 강요에 담대하게 맞서겠다고 하던 이들이 타협하고 침묵했으며, 상당수 총회장 출신이나 노회장들이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총독부의 회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결국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회된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는 한국 장로교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결의를 내렸다. 10일 속회된 총회 현장에는 일본 무술경찰관들에 포위된 채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합계 206이 앉아 있었다. 총회에 앞서 일본 경찰에 의해 회유된 목사들에 의해 각본대로 신사참배 제안, 동의, 재청이 이어졌고,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토의 절차도 없이 결의를 거치려고,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았다. 약 10명이 “예”라고 대답했고, 나머지 총대들은 침묵을 지켰다. 총회장이 만장일치로 가결된 것을 선포하자, 방위량 선교사가 “아니오”를 외쳤고, 곧바로 일본 형사에 의해 발언이 제지당했다. 이어 그의 사위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합니다”고 발언했고, 이내 경찰에 멱살이 잡혀 끌려 나갔다. 소란 후 총회에 참석한 노회장 23명은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 하에 평양신사에서 머리를 숙였다.

1938년 이후 조성예수교장로회는 소위 일본화의 길을 걷게 됐다. 194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따라 창씨개명에 관한 수속절차에서 주의할 점을 전국교회에 시달했다. 1945년 7월 19일에는 조선총독부의 제안에 따라 각 교파가 연합해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조직됐다. 그러나 이 같은 치욕의 역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출범한다는 공식적인 통보를 전국 각 교회에 보낼 시간적 여유도 없이 장로교회와 한국 개신교회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됐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 1913년 중국에 파송한 3명의 선교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최초 선교사 중국에 가다

박태로·김영훈·사병순 목사, 산동성서 사역


1912년 제1회 총회 결의에 따라 1913년 11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3명의 목사가 가족을 데리고 중국 산동성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중국 선교부는 조선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산동성 내양현을 중심으로 6개 현을 배당했는데, 인구는 약 380만명이었다.

세 명의 선교사들은 중국에 도착한 후 많은 문화충격을 겪었다. 중화문화권 아래서 한국 선교사들은 하나의 소수민족에 불과했다. 배후에 영향력 있는 교회도 없는데다, ‘조그마한 나라’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중국 사람들이 존대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선교사는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인들의 멸시와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동방의 예절을 지켜 내양시의 중국 관리를 방문하는 등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선교사들임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고, 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감격으로 시작한 산동선교부는 한 시기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와해됐다. 박태로 선교사는 질병으로 순직하고, 나머지도 1917년 본부와 충분한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한국 장로교는 1918년 방효원과 홍승한을 다시 파송했고, 이듬해는 박상순 선교사가 합류해 팀을 새롭게 구성했다. 이어 이대영 목사(1922), 김윤식(1918), 주현측(1923), 안중호(1931) 의료선교사 등이 동역하기 시작하고, 대구에서 파송되어 온 조소임(1922), 이영애(1924), 편순남(1930) 등은 선교사 자녀 학교의 교사로 섬겼다. 또한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여성을 위해 독신여성인 김순호 선교사(1931)를 파송했다.

이 시기는 산동 선교의 전성기였다.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에 감동한 중국교회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140만 인구가 사는 내양현 전체를 한국 장로교 선교부에 이양했다. 선교 열매도 많아 교회가 20여 개, 기도처가 30여 개로 늘었고, 세례교인이 1000명이 넘었으며, 학교도 10여 개나 운영했다.

그러나 중국 선교는 제2차 세계대전과 중국의 정변으로 일시중단 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방효원 선교사가 은퇴하고, 1937년 그의 장남 방지일 선교사가 그 사역을 계승했지만, 대동아전쟁이 시작하면서 선교사들은 수난을 맞게 됐다. 김순호 선교사는 1938년 만주로 선교지를 옮기고, 박상순, 이대영, 방지일 선교사는 중국 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 귀국하고 만다. 방지일 선교사는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때까지 선교지를 지키다, 결국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해 1957년 9월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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