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대부흥운동과 총회의 조직(1901~1912)

 
대부흥 열기 ‘민족 복음화’ 조직이 되다

1907년 독노회 조직 5년 만에 7개 노회·221명 총대 참석한 역사적 총회 출범

①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들. ② 1907년 1월 겨울 남자 사경회가 열린 평양 장대현교회. ③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조직 기념.
친구의 돈을 가로챘다는 길선주 장로의 회개고백은 호렙산 제단 위에 내린 불꽃과 같았다. 성령의 강한 임재가 장대현교회를 휘감았고, 사람들의 몸은 떨렸다. 회중 가운데 상투를 틀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한 사람이 일어났다. 죄를 고백하고, 바닥에 고꾸라져 가슴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또 한 사람이 일어나 눈물을 쏟았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죄가 숨을 곳은 없었다. 고백들이 있은 후에는 온 회중이 통성기도를 드렸다. 눈물과 탄식, 회개와 감사가 한데 어우러진 기도소리는 하늘 보좌를 향해 포효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사경회는 애초 평안남도 개교회 지도자들의 지역모임이었다. 그러나 평양대부흥으로 불리는 그 부흥의 열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평양 시내의 미션스쿨과 평양신학교의 열기는 즉각적이었다. 숭실학교는 2월 개학하자마자 특별기도회를 가졌고, 평양신학교 역시 새 학기를 맞아 부흥사경회를 개최했다. 성령의 역사 역시 장대현교회 때와 못지않았다. 죄 고백과 함께 강렬한 기도가 이어졌다.

평양대부흥의 열기가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어졌듯, 평양대부흥 운동 역시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연속성을 떼어놓을 수 없다. 1903년 화이트와 맥컬리 두 여자 선교사의 기도모임으로부터 시작된 원산부흥운동은 감리교 하디 선교사의 회개로 이어졌고, 선교사들과 조선인들 사이에게 거대한 영적 감흥을 쏟아 부었다. 원산부흥운동은 1904년 접어들면서는 원산을 넘어 강원도, 개성, 서울로도 확산되었다.

일련의 부흥운동들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부흥운동과 노회와 총회의 조직,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착 등을 힘입어 양적, 질적 모두 놀랍게 성장했다. 1901년에 2개에 불과했던 조직교회가 1904년에는 8개, 1905년에는 13개, 1906년에는 29개로 증가했고, 교회당 신축도 1901년에는 55개에 불과했으나, 1906년에는 184개로 증가했다. 특히 당시 조선 땅은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 하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굴곡 속에 있었던 터라, 개신교는 절망 속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한 줄기 소망이기도 했다.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은 자연스레 조선인 목회자 양성 필요로 이어졌다.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은 1901년 함께 모여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면서, 평양에 신학교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서북지역,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상황이라 평양은 신학교 위치로 적소였다.

평양신학교 설립에는 새뮤얼 모펫(1864∼1939·마포삼열)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 모펫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허락을 요청했다. 필요한 기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북장로교는 신학교 설립을 허락하고 그 일을 모펫 선교사에게 일임했다. 청일전쟁 후 서북지역 선교를 주도한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전권을 맡긴 것이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술막골에 있는 모펫 선교사 사택이 신학교로 개방됐다. 최초의 신학생은 장대현교회 시무장로인 방기창과 김종섭 두 명이었다. 1902년에는 장로 양전백, 길선주, 조사 이기풍, 송인서가 신학생으로 들어와 1903년 봄에는 신학생이 6명으로 증가했다. 최초 교수진은 모펫과 그레이엄 리 선교사 등 매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신학생들의 학비는 전국 교회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지원했다. 교회들이 이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한 것은 신학교에서 3개월간 집중교육을 받는 것 외에 신학생들이 전국에 흩어져 교회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신학교 첫 졸업생은 평양대부흥이 일어나던 1907년 6월 20일 배출됐다. 졸업생들은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총 7명으로, 이중 방기창과 서경조가 58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한석진이 41세, 길선주, 송인서, 이기풍이 40세, 양전백이 가장 나이 어린 38세였다. 평양신학교는 그전까지 교명이 사용되지 않고 ‘신학반 ‘목사 공부하는 학원’ 등으로 불리다가,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그 해부터 ‘조선장로회신학교’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렸다.

1907년은 평양대부흥, 평양신학교 첫 졸업생 배출 이외에 독노회가 조직된 역사적 해이기도 했다. 앞서 1905년 장로회공의회는 1907년 조선에 독노회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독노회 조직 결정은 장로교회가 제도적 조직을 가진 민족교회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기였다.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3명의 선교사, 36명의 조선인 장로, 9명의 찬성위원 등 총 78명이 모인 가운데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됐다. 독노회 조직 현장에 한국 선교의 개척자였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건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외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은 거의 다 참석을 했다. 임원 선거에서는 게일 선교사의 추천으로 새뮤얼 모펫 선교사가 노회장에 선출되고, 부노회장은 방기창이 선출됐다. 역사적인 노회 설립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전보로 알려졌으며, 미국 남북장로교회와 영국,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 총회에 감사편지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독노회에서는 또 그해 평양신학교 7명의 졸업생들을 문답을 거쳐 목사로 장립시켰다. 17일 저녁 선교사들은 7명의 졸업생들에게 목사 안수식을 거행했다. 조선인 최초의 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안수식에서 대한성서공회 대표 밀러(H.Miller) 목사는 7명의 목사들에게 한글성경을 한 권씩 나눠주었다.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의미였다.

독노회에서는 안수받은 7명의 목사들을 각 지역별 교회 목사와 전도목사 등으로 임명했는데, 특별히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첫 독노회에서 조선인 최초의 목사 중 한 명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한국교회의 선교정신을 분명히 인식시키는 사건이었다. 그 후에도 선교는 계속돼 1909년에는 안수 받은 최관흘 목사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송해 그 지역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도록 했다. 총회가 조직된 1912년에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3명을 중국 산동성 내양현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했다. 외국인을 향한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다.

독노회 조직부터 총회 조직까지는 불과 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된 이후 장로교회는 해마다 경이적인 성장을 이룩해 총회 설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906년 1만 2500명이던 세례교인수가 1910년에는 3만 2500명으로 증가했다. 1911년 제5회 독노회에서 1912년 총회 조직을 결정한 이후, 드디어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평안남도평양경창문안녀셩경학원’(장로회신학교)에서 역사적인 제1회 ‘예수교쟝로회죠션총회’가 열렸다. 조선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등 목사 총대 96명과 장로 총대 125명 등 총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했다. 총회에서는 총회장에 언더우드, 부총회장 길선주 목사를 선출했다.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조선인 총대들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할만한 완숙한 지도자가 총회장으로 틀을 다지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노회는 경기충청, 남평안, 북평안, 황해, 전라, 경상, 함경 등 총 7개였다.

 

 

 


 

1907년 ‘장로회 규칙’ 채택

4개 조항과 세칙 구성…장로교회 기본원칙 제시

 

▲ 일러스트=강인춘
1907년 첫 독노회 때는 여러 안건이 토의되고 결의되었는데, 그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도 채택됐다. 제1조 ‘교회’, 제2조 ‘예배절차’, 제3조 ‘직원’, 제4조 ‘교회의 치리’와 세칙으로 구성된 장로회 규칙은 독노회 때 같이 채택된 12신조 신앙고백에서 다루지 못한 교회의 의미와 장로교회가 지켜야 할 기본원칙들을 제시했다.

 

규칙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예수의 몸이요 성신의 전”이라고 정의했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개혁주의 전통에 따라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교인은 하나님만이 아시나 보이는 교회는 온 세상에 설립된 교회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규칙 제2조 ‘예배절차’에서는 “주일에 모든 신도가 마땅히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할지니 예배하는 절차는 기도함과 찬미함과 성경을 보고 강조하는 것과 연보하는 것과 안수기도하는 것과 성례를 베푸는 것인데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니 이 두 가지는 목사만 베푸느니라”고 밝혔다.

제3조 ‘직원’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의 책임과 역할을 다뤘다. 직원은 장로와 목사로 구성되며, 장로는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자와 치리장로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를 목사, 후자를 장로라 불렀다. 목사는 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세움을 받는다고 사실이 밝혀져 있으며, 목사는 지교회 목사와 두루 다니며 전도하는 전도목사로 구분했다. 장로는 “지교회 교인들에게 택정함을 받고 또 목사에게 안수함으로 세움을 받아 목사와 더불어 지교회의 신령한 일을 살펴 다스리는 자”로 규정했다. 집사에 대한 규칙도 세웠다. 집사는 교인들에게 택함을 받아야 하고 목사에게 안수를 받아야 하며, “목사와 장로로 더불어 병인과 궁핍한 자를 돌아보며 지교회의 연보함을 받기도 하고 쓰기도” 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했다.

제4조 ‘교회의 치리’에서는 치리기관인 당회와 노회, 총회에 대한 규칙을 정했다. 당회의 회원은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며, 지교회를 총찰(總察)하는 역할을 하고, 노회는 지경 안에 있는 당회와 지교회와 목사와 강도인과 아직 지교회로 조직치 못한 교인을 총찰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규정했다.

이 같은 교회의 규칙은 교회의 본질과 하는 일이 무엇이며, 직원을 어떻게 세우고 하는 일 등이 무엇인지를 규명해 줘 교회가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틀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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