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보육원 소년서 목회자로-김재육 목사

  
전쟁 후 참담한 상황에서도 보육원·컴패션 도움으로 목회자 꿈 키워나가
생명줄 같던 미국 흑인 후원으로 학업 마쳐…구제사역 사명 갖고 나눔 앞장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와 집을 잃고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난과 굶주림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불굴의 의지와 주변 국가들의 도움으로 세상 풍파를 이기고서 7, 80년대 우리나라의 성장을 이끈 역군이 됐다.

노원구 상계동 삼일교회의 김재육 목사 역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태어나 전쟁의 후유증을 몸으로 겪은 세대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때까지를 보육원에서 보냈던 김 목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받은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목회자가 됐다.

전남 신안군 장산면. 이 작은 섬이 김재육 목사의 고향이다.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목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되자 근처 신안보육원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엔 편부모 가정이나 형편이 어려웠던 가정의 아이들도 보육원에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때 제가 들어갔던 보육원이 한국컴패션의 도움을 받던 곳이었어요. 아이들의 의식주와 교육을 책임진 것은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의무적으로 성경공부도 시켰는데, 거기 있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정도였습니다.”

보육원 원장 선생님과 컴패션의 정성이 있었지만, 전쟁 후 상황이 워낙 어려웠던지라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질리도록 강냉이죽으로 끼니를 연명했던 탓에 지금은 죽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영양실조로 병원신세를 졌던 적도 있었고, 보육원 생활이 지겨워 친구들과 서울로 가출을 꿈꿨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당시 가출한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정도로 그 때의 일들은 추억이 됐다.

컴패션의 대표적인 후원방식인 일대일 결연도 김재육 목사는 직접 경험했다. 자신의 후원자와 감사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그 분 덕택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고등학생 때까지만 후원을 받지만, 저와 그 후원자는 특별한 인연을 맺었죠. 대학 등록금까지 그 후원자에게 지원받게 된 것입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보육원을 나와서 김 목사는 막노동과 포장마차 장사를 하며 근근이 끼니를 이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목회자가 되겠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몸이 피곤한 일이었어도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5년 후, 보육원에서 성경교사로 일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그 곳에서 지속적으로 신학공부를 하다가 총신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으로 한 학기 등록금과 얼마간의 숙식은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첫 학기의 5월 4일,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응답을 받고 휴일이었던 다음날 하루 종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엔 크게 실망했죠. 하지만 한 달 뒤인가요? 컴패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전에 신청했던 장학생 선발에 합격했다고요. 그 공문을 확인해보니 합격된 날짜가 5월 5일이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장학금을 보내주기로 한 분은 고등학교 때까지 저를 후원해주셨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김재육 목사는 당시 후원자에게 받았던 편지를 회상하면서 그 후원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었으며, 결코 부자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 내용상 배움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보내준 작은 돈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으며,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

“저를 돕기 위해서 그 후원자 분은 많은 희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희생을 감수하고 그 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제가 대학에 다니고 목회자가 되는 것은 꿈도 못 꿨을 일입니다. 그 장학금은 저에게 생명줄과도 같았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을 거쳐 지금은 어엿한 담임목사가 된 김재육 목사는 어린 시절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생각하며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자신이 있었던 신안보육원의 학생들과 교사들을 초청해서 홈스테이를 하며 서울 구경을 시키는 일은 벌써 10회가 넘었다. 아들 내외와 함께 컴패션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컴패션에서 양육을 받았던 어린 소년이 이제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제는 의무입니다. 복음으로 영혼을 살릴 뿐 아니라 구제로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저와 같이 어려웠던 아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으로 새 힘을 얻어 꿈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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