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순교자 유족 최완근 목사

  
아버지 최감은 목사, 교회청년들 피신 돕다 인민군 총에 대동강변서 숨져
가족인생 고비마다 순교정신이 버팀목… “후세들 희생정신 잃어가 안타까워”


▲ 최완근 목사.
“막내아들이라 어렸을 때 유독 많이 귀여워해주셨어요. 채마밭에서 토마토며 철마다 과일을 따주시던 기억이 생생해요.”

60년도 넘은 옛날 일이지만 아버지를 회상하는 아들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최완근 목사(68·서정제일교회 원로)에게 아버지 최감은 목사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평양에서 2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구동창교회를 담임하던 최감은 목사는 매일 설교하고 심방하느라 자식들을 돌볼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최완근 목사 또한 1950년 당시 일곱 살에 불과했던 터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이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한 때가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51년 8월 말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가족과 교회 성도들이 함께 드렸던 장례예배 현장이었다. 관도 없이 가마니에 싸여 돌아온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사람들은 예배의 시작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눈물바다를 이뤘다. 최원근 목사를 포함해 가족들은 최감은 목사의 순교 현장을 직접 보진 못했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퇴각하던 인민군들은 당시 감금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하나둘 처형하기 시작했다. 인민군들로부터 교회 청년들을 숨겨주다 함께 잡혀갔던 최감은 목사도 그들 중에 끼어있었다. 대동강변 백사장으로 끌려온 포로들 사이에서 최감은 목사는 마지막 기도를 인민군들에게 요청했다. ‘우리에게 총을 겨누는 인민군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치자마자 타당탕! 총소리가 울렸고, 이내 사방은 정적에 쌓였다. 20여 일 후 가족들은 교인들과 함께 시체더미 속에서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낯익은 스웨터 하나가 눈에 띄었다. 큰 딸이 짜준 스웨터였다. 마침내 가족들의 품에 안긴 최감은 목사는 장례예배 후 구동창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야산에 안장되었다.

최감은 목사의 죽음은 한국교회 앞에서는 순교였지만, 가족들에게는 가장을 잃고 생계가 막막한 고생의 시작이었다. 전쟁통이었으므로 피난이 급선무였다.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평양에 있는 고모댁을 찾았다가 다시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막내아들이었던 최완근 목사 역시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과 함께 개성을 들러 서울로 피난길을 떠났다. 아버지의 유품은 어머니가 성경에 끼워 넣어온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다행히 서울에는 최완근 목사 가족과 같은 순교자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거처가 있었다. 장충동에 있는 순혜원이었다. 최완근 목사는 70∼80여 명의 다른 순교자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장로교총회 선교부의 지원과 형들이 서둘러 일자리를 찾은 덕에 상대적으로 생계 걱정은 적었지만, 태산 같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아직도 텔레비전에서 인민군복이 나오면 기분이 안 좋아요. 교회를 개척할 때도 너무 어려울 때가 많아 아버지가 계셨으면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인민군에 대한 원망에도 불구하고, 최 목사는 정작 북한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할지 잘 알고 있다. 북한을 더 돕고 기도하는 것이 순교자의 바람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때문에 자신 또한 기도시간 마다 북한을 향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국 길림성 두만강변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두 손을 들고 기도 했어요. 통일이 되면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요.”

순교 정신은 최 목사의 인생길에 지표가 되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30년 넘게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한 시도 아버지의 순교 정신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순교자의 아들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다짐과 아버지처럼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친구 한 분이 면회를 갔었는데,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하셨대요. 그 말씀을 아버지의 유언으로 생각하며 살았어요.”

다른 가족들도 순교자의 아내로, 아들딸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았다. 어머니 이기옥 사모는 평안교회 권사로 남은 평생을 교회를 섬기다 1978년 소천했고, 형제들 역시 목사사모로, 권사로, 안수집사 등으로 살고 있다.

순교자의 아들로 최 목사는 한국교회 앞에 ‘희생’을 강조한다. 주님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진정한 사랑과 결단이 자꾸 메말라 가고 있다는 염려다.

“순교적인 신앙을 자꾸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순교 신앙이 약하니까 재림 신앙도 약해지고, 주님 오실 날보다는 현재에 더 마음을 두는 것 같아요.”

최 목사는 2007년 조기은퇴를 선택했다. 후배 목회자들을 위한다는 마음과 세계 열방을 품는 선교사역에 대한 열망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순교 신앙 또한 결심에 힘을 보탰음은 분명하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도 중요하잖아요. 순교가 선교고, 선교가 순교라는 마음으로 목회했는데, 앞으로도 그 마음으로 살래요.”

순교자 최감은 목사는…
1905년 8월 27일 태어난 최감은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렸고, 부모님을 따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큰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수학해 목사가 됐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역시 장로 안수를 받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최 목사는 28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34회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동안 전도사로 봉직해오던 식송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근처에 있던 풍전교회도 맡아 시무했다. 그 후 사인장교회와 동평양교회를 거쳐 1949년 봄, 처가가 있는 구동창교회를 섬기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교회에 대한 인민군의 핍박이 한층 거세졌다. 최 목사는 교회 제직들과 청년들이 인민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신처를 물색하며 뒷바라지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사택 창고 바닥에 은신처를 마련했던 것이 발각돼 최 목사는 수배를 받게 되고, 한 교인 집 부엌 다락에 은신처를 마련해 제직들과 함께 기거했다. 그러던 중 친구였던 김윤찬 목사(49회·52회 총회장 역임)를 숨겨주게 되고, 김 목사의 피신을 돕다가 결국 인민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심한 매질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 갖은 고문 속에서도 최 목사는 믿음을 지켰고 교회 청년들이 숨어있는 곳을 실토하지 않았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퇴각하던 인민군들은 최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인 포로들을 대동강변으로 끌고 갔다.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 목사와 장로, 집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찬양을 불렀다. 신경이 곤두선 인민군들의 중지하라는 외침도 소용이 없었다. 그 가운데 최 목사의 찬양 소리도 드높았음이 틀림없다. 그날의 현장은 시체더미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한 사람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51년 8월 9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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