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로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실재였으며 재발되어서는 안 될 민족의 비극이었다. 본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다른 인생을 살아야했던 신앙인들에게 한국전쟁에 얽힌 증언을 들음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한국교회가 국가의 안녕을 위해 감당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되새겨본다. 첫 회에서는 전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로가 겪은 전쟁의 참상을 듣는다. <편집자 주>


목회자 꿈꾸던 중 핍박 피해 월남…특수유격대 ‘백골병단’ 이끌며 전투

어머니·동생 앗아간 참혹한 전쟁…확고한 국가관 정립에 교회 노력해야


▲ 채명신 장로는…채명신(1926년 11월 27일~) 장로(여의도순복음교회)는 황해도 곡산군 출생.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1960년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군사정권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1965년 주월한국군 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 월남에 다녀왔다. 외교관 경력으로는 1973년 주그리스 대사관 대사, 77년 주브라질 대사관 대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베트남전쟁과 나(회고록)>·<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은 1950년에 발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6.25는 1950년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북한은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준비해왔다. 총칼을 휘두르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서로를 경원시하는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북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사였으며 주말에는 교회에 나가 청년면려회 대표로 봉사에 열심을 내던 기독청년이었다. 나의 꿈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북에 공산군이 진주하고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는 목회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내 생이 바뀐 사건은 1947년 1월말에 일어났다. 나의 어머니가 권사 겸 전도사로 섬기고 있던 평안남도 진남포 인근의 덕해교회에 들이닥쳐 교회 폐쇄를 명령하던 공산당원들과 충돌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곧이어 닥칠 공산당원들의 숙청과 교회에 대한 핍박을 피해 월남했고, 월남의 과정에서 보안소에 끌려가는 우여곡절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까스로 남한에 안착했다.

월남 3개월 만에 육사 5기생도가 되어 내가 처음으로 부임한 것은 제주도였다. 4.3 사태 직후에 부대에 배속을 받은 나는 탈북자라는 이유로 부대원들에게 암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를 볼 때마다 적의의 눈초리를 쏘아대는 부하들을 보면서 나는 밤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일쑤였다. 드디어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태백산지구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당시 강원도 경북 산악지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됐다. 북한은 2500여명의 유격대를 100명 단위로 해상과 산악을 통해 침투시키면서 우리 군을 괴롭혔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문제는 우리 군에 있었다.

전투의 와중에도 부대를 무단이탈해 민가로 내려가 돼지와 닭 등을 잡아먹는가 하면 식량과 김치를 퍼다 먹었다. 국군에 대한 민심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이래 가지고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대원의 무단 외출을 금지시켰고 군기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했다. 기상과 함께 군가를 부르고 마을의 주요 거리를 청소하도록 했다. 주민들의 생산물을 높은 가격을 쳐서 사주었다. 그러자 민심이 우리 군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어느 정도 군에 대한 호감이 형성되자 나는 주민들에게 적들이 마을에 내려와 가져간 양식과 물품, 사람의 수, 지나간 곳 등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지도에 이 내용들을 기록하니 적의 이동경로와 병력 규모 등이 파악됐다. 이때부터 적이 나타나면 우린 한발 앞서 이동경로를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했다. 비록 중대병력의 규모였으나 우리는 빨치산 토벌대를 잡는 부대로 이름을 떨쳤다. 이 태백산 전투때 나는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다.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가까스로 월남해 인천에 정착해있던 어머니가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3주간동안 행복한 만남을 가졌다. 이후 6.25 전쟁이 터졌고 어머니는 곧바로 인민군에게 끌려가셔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 없다.

영덕지구 빨치산을 토벌한 뒤 안동에 있을 때 전쟁을 맞았다.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은 우리 군은 우왕좌왕이었다. 우리 중대는 동해안으로 출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삼척에 상륙한 적 1개 연대와 대전했다. 적의 병력은 정규군 3000여명이었다. 한때 유엔군의 지원에 힘입어 우리 중대는 자강도 희천까지 진격했으나 곧 중공군에게 밀렸다. 이때 나는 두 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해 12월쯤 낭림산맥 지역에서 적에게 쫓기던 중 적지에 고립된 연대장을 구하기 위해 특공작전을 벌였다. 가까스로 구출에 성공했으나 “닭 한 마리 먹고 싶다”는 연대장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민가로 내려갔다가 적의 포위공격에 걸려들었다. 그때 필사적으로 살아나왔으나 가까스로 구해낸 연대장을 다시 잃었다. 며칠 후에는 부하 2명과 더불어 민가에 들어갔다가 북한군 20여명에게 포위를 당했다. 집안에 있었는데 밖을 적군들이 포위를 해서 살아나갈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권총을 꺼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뜻밖에도 “딱!”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발이었다. 다시 총구를 들이대는 순간 부하가 크게 외쳤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은 것은 죽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 부하의 외침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나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기적적으로 포위대열을 뚫고 진지로 도망해왔다.

전장에서의 전과를 인정받아 나는 1951년 초 우리군 최초의 특수유격대인 ‘백골병단’을 이끌게 됐다. 특수유격대라고 하지만 부대원들은 사실 민간인들이었다. 그러나 의욕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식량은 2주일 치의 미숫가루와 고추장, 소금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려움을 모르고 북한 진지 깊숙이 침투해 적의 초소를 박살내기도 했고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이 길원팔을 생포하기도 했다. 숱한 진격과 후퇴 속에서 나는 많은 부하 전우들을 잃었다. 때론 총탄에, 때론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죽어간 부하들이 적지 않았다. 단목령(일명 박달재)에서는 한번에 120여명을 잃었다. 그들은 정식 군인 계급장도 달아보지 못한 채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5연대장 시절에는 하나밖에 없던 동생을 잃기도 했다. 내 동생은 1.4 후퇴 때 월남해 장교로 입대했다. 동생은 내가 근무하던 부대 바로 옆 36연대에서 근무했는데 전과를 올려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훈장을 받은 후 휴가를 거부하고 전투에 임했다가 적의 60mm 박격포를 맞고 사망했다. 동생의 죽음에 동생의 부대장이 나에게 사과할 때 의연한 척했지만 전화를 끊고 소리 내어 울었다.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슬픔도 흐르는 시간을 막지 못했다. 1951년 8월 부연대장이었던 나는 5연대장에 임명됐다. 소위로 임관한 후 3년 4개월 만에 연대장(대령)으로 진급한 것이었다. 5연대장 시절에는 800고지를 점령했으며 60연대장 때에는 2개 대대병력으로도 점령하지 못했던 M1 고지를 1개 중대로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점령했다.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수없이 죽어간 부대원들, 민간인들, 적군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전쟁은 결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비극 가운데 비극이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겼고 인격이 깨지고 가족관계가 박살이 나고 남북의 분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 무관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안보의식을 높여야 한다. 자위력을 키우는데 관심을 가져야 하고,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동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앙의 자유도, 정치나 경제도 국가안보가 보장이 되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은 총칼의 강력함 때문에 승패가 갈리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안보의식이 어떠하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는 예측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전쟁 때 남측이 큰 피해를 당한 것도 당시의 안보의식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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