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가 김준근의 〈텬로력뎡 삽도〉 영인 해제본 발간
19세기 조선 현실 바탕 재해석…“신앙 점검 계기 되길”

▲ 1895년 서울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에서 발간된 서양소설 〈텬로력뎡 삽도〉의 표현 방식은 외래 종교를 한국의 문화양식에 바탕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견해의 증거가 되고 있다. 오른쪽 그림은 〈텬로력뎡 삽도〉 제11장면으로 예수(왼쪽 첫번째)가 물로 불을 끄고 기름으로 불이 일게 하는 모습을 해설자가 크리스천에게 설명하고 있다.
1895년 서울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에서 발간된 서양소설 〈텬로력뎡〉(天路歷程)은 장안에 선풍적인 인기였다. 너도나도 책을 사고 돌려 읽는 통에 출판사는 재판(再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온갖 고난과 좌절을 견디고 천성을 향해 나가는 모습은 외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에 지쳐있던 조선 백성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소설의 내용과 더불어 조선인들에게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소설에 나오는 삽도(揷圖) 속 장면들이 다름 아닌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을 비롯해 모든 등장인물들은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짚신을 신은 조선인이었다. 천사 또한 한국 고전의 선녀였다.

1894년경 미국 북장로교 소속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선교사는 아내 해리엇과 함께 〈텬로력뎡〉을 번역한 후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소설 이해와 흥미를 돋울 삽도를 그려줄 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민 끝에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을 선택했다. 조선후기 마지막 풍속화가로 일컬어지는 기산은 당시 원산,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서 외국인에게 조선 생활문화를 담은 그림을 다량 제작해 판매하고 있었다. 게일 선교사의 부탁을 받은 기산은 17세기 영문본 삽도를 참조해 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산의 붓끝에서 탄생한 삽도는 서양의 그것과 형태는 비슷했지만, 인물과 배경은 전부 조선의 것이었다. 선교지 토착적 정서에 맞는 선교방식을 추구한 미국 북장로교의 방침과 게일의 노력에 기산의 화력(畵力)이 더해 한국 기독교미술의 효시가 된 42점의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박효은 박사(홍익대 강사)는 “17세기 영국소설의 내용과 19세기 영국 삽화가의 화면이 19세기 말 조선의 현실과 관념 속에서 재해석되고 번안되는 문화적 결절현상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기산의 삽도는 〈텬로력뎡〉과 별도로 〈텬로력뎡 삽도〉란 이름으로 묶어져 나오기도 했다. 〈텬로력뎡〉과 마찬가지로 목판인쇄됐다. 삽도집을 따로 만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로, 〈텬로력뎡〉이 당시에 아주 특별한 의미였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삽도집에는 또 우리나라 최초로 예수상이 수록되기도 했다. 11번째 장면에 나오는 예수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으며, 인자한 얼굴로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텬로력뎡 삽도〉를 소장하고 있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최병현)은 최근 책을 영인 해제해 〈기산 김준근의 기독교미술 텬로력뎡 삽도〉를 출간했다. 19세기 조선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을 선교현장이 도록 너머에서 어슴푸레 떠오를 듯하다.

최병현 관장은 “〈텬로력뎡 삽도〉의 표현 방식은 외래 종교를 한국의 문화양식에 바탕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견해의 증거가 되고 있다”며 “이 도록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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