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신앙 대탐험/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4. 칼빈의 흔적을 더듬다 (4)제네바

[칼빈 500주년 기념 특별기획]

기욤 파렐 설득에 정착, 28년간 머물며 개혁 중심지로 바꿔
제네바대학·교회 두 곳 기반 삼아 불굴의 개혁 사역 전개

‘제네바는 칼빈의 도시다.’ 이렇게 말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 제네바는 웬만한 국제기구가 다 모여 있을만큼 세계적인 도시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칼빈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네바를 근세 도시로 닦은 사람이 칼빈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명암을 알아보려면 제네바에서 그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만 하면 된다.

 

▲ 칼빈이 강론을 펼쳤던 성 베드로교회(위), 교회옆 계단에서 거지가 구걸하고 있다.
스위스 바젤에서 천천히 남하하면서 제네바를 살펴보기로 했다. 바젤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을 쓰고 인쇄한 곳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바젤역을 통과하여 뮌스터성당부터 찾았다. 빨간색 성당은 이곳저곳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칼빈에게 인문학의 영향을 끼친 에라스무스가 1536년 이곳 바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묘석이 뮌스터성당 왼쪽 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 해, 종교개혁의 샛별인 르페브르 교수가 눈을 감았다. 모두 칼빈에게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칼빈은 이때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 기욤 파렐의 ‘설득’에 못이겨 제네바에 안착하게 된다. 어찌 생각하면 역사는 참 재미있다.

 

뮌스터성당을 둘러보고 성당 언덕배기에서 바젤시내를 관통하는 라인강을 쳐다보면서 모처럼 여유를 부렸다. 라인강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독일만 떠오르는데 스위스 땅에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이 금새라도 푸른 물을 뚝둑 떨어뜨릴 것 같은 그런 날씨를 만끽하며 성당 뒷골목을 나와 바젤 구 시청사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칼빈이 잠시 머물렀던 바젤대학과 교회 등을 잇따라 찾아보고 제네바로 향했다.

 

▲ 제네바 바스티옹공원에 있는 종교개혁가 동상.
레만호에서 불어오는 아침바람을 맞으며 기지개를 폈다. 드디어 칼빈이 생활했던 제네바를 만나러 간다. 우선 동선을 줄이기 위하여 플랭 팔레지역의 칼빈 묘역부터 찾았다. 칼빈은 “부활의 날을 기다리기 위해 보통 방식으로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묘비도, 묘석도 없다. 그는 28년간 제네바에서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가 숨질 때, 그의 옆에는 그를 제네바에 머물도록 강권했던 기욤 파렐이 함께했다. 칼빈은 그렇게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어제와 달리 잿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칼빈의 묘지를 둘러보고 그가 설립한 제네바대학으로 바로 떠났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세미나 포스터가 만국기 마냥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제네바 바스티옹공원을 찾아 칼빈탄생 400주년에 세웠다는 종교개혁가 동상부터 만났다. 파렐, 칼빈, 베자, 낙스 등 4명이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그런데 이곳도 기념행사장으로 변모하여 무대세트로 활용되고 있었다. 가까이 촬영할 수 있어 좋았지만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제네바 대학로 오른편 길을 따라 칼빈이 늘 오고갔던 캐논거리 11번지로 갔다. 칼빈이 매일 걸었던 길이다.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개신교 자유를 약속받고 제네바에 귀환한 칼빈은 시에서 제공한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제네바 교회법’을 작성하고, 각종 논문을 쓰고, 책을 저술했다. 평상시에 늘 개방하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지척에 있는 성 제르베교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안내자가 예배가 끝나고 들어올 것을 요청했다. 성 베드로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베드로교회는 예배드리는 것을 제재하지 않았다. 나이드신 대략 100명 남짓한 분들이 경건하게 찬양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거지가 교회 계단에 주저앉아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교인들은 애써 그를 외면했다.

 

▲ 교회옆 계단에서 거지가 구걸하고 있다.
칼빈은 이 두 곳의 예배당에서 강론을 펼치고, 치리회를 주재하고, 혼인예식과 세례식을 담당했다. 공개강연과 강해설교도 당연히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제네바대학, 베드로교회(제르베교회), 집으로 이어진 트라이앵글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했다. 한 마디로 제네바를 신앙의 중심지로 만든 곳이 바로 여기다. 캐논거리는 밀려오는 피난민들의 안식처였다. 매년 1천명씩 찾아드는 피난민을 위해 칼빈은 집도 마련해 주고, 시 의회를 설득하여 의복공장도 운영하도록 했다. 그만큼 캐논가는 소외된 이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머무는 공간이었다.

 

참고로 칼빈은 평생 청빈하게 살았다. 그가 ‘시편 주석’에 “평생토록 부자도 아니고 돈을 모은 일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죽은 뒤 남은 재산은 225달러에 불과했다. 칼빈은 빈궁한 삶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부요를 즐길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더 커 보인다.

칼빈이 강론을 펼쳤던 베드로교회 강대상 밑에서 방문했던 일행과 같이 합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삶만 살게 하소서.”

교회 내부는 외관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성도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칼빈의 삶은 늘 전투였다. 제네바 시민의 방탕한 생활은 끊이지 않았고, 이단자들의 목소리는 정제되지 않은 채 거세게 물결쳤다. 그럴수록 칼빈은 부드럽고 의연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를 사기꾼이라 매도하고, 미치광이라 부르고, 심지어 또다시 추방하라고 외쳐도 칼빈은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강설과 요리문답의 권징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천천히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칼빈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제네바의 개혁을 신앙의 도시로 바꾸어 나갔다. 칼빈이 왔을 때 소돔과 같던 제네바는 그의 불굴의 의지로 하나님의 성으로 변해갔다.

“나는 다른 곳에서 첫째가 되는 것 보다 제네바에서 꼴찌가 되는 것이 낫다.”

기욤 파렐의 말을 되새기며 왜 제네바가 현재 세계 국제도시로, 아니, ‘신앙의 1번지’로 손꼽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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