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에 의해 행위도 의롭게 된다”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행위의 의를 자랑해선 안돼


[제20강좌] 성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거룩해짐 (기독교강요 3.14.1-3.18.10)


1. 성도의 선행(bona opera)

사람은 ‘의’(iustitia)에 따라서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우상숭배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둘째,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성례에도 참여하나 명목적으로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 있다. 셋째, 마음의 불법을 숨기고 외식하는 위선자가 있다. 넷째,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거룩함’(vera sanctimonia)에 이끌리는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창 6:3) 마음이 거짓되고(렘 17:9), 그 계획하는 바가 온통 악하며(창 8:21), 생각이 허무하고(시 94:11),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시 14:2),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시 36:1; 롬 3:18). 이들의 행실은 심히 악하여 음행과 우상숭배와 당 짓는 것과 투기를 일삼는다(갈 5:19-21).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여러 재능들을 선물로 주셔서 덕스럽게 하시지만, 그들의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모두 가증스러울 뿐이다(3.14.1-3).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사람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는 첫 번째 종류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실을 돌아보시고(렘 5:3) 참 믿음으로 순결한 영혼의 헌신을 받으시기 때문이다(행 15:9). 거룩한 것에 기름이 묻으면 어찌 얼룩이 지지 않겠는가(학 2:11-14)?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외식하는 자와 그 행위를 의롭다 하시겠는가(3.14.7-8)?

하나님 앞에서 의와 불의가 구별되는 것은 ‘행위의 법’(lex operum)이 아니라 ‘믿음의 법’(lex fidei)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선행도 죄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없는 곳에 결단코 성화는 없다”(quando sine Christi communicatione nulla est sanctificatio).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값 없이 우리를 부르셨듯이 그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함도 오직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엡 2:10; 딤후 1:9).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롬 4:17)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셔서(고후 5:17) 선한 일을 행하게 하셨다. 온 천하의 모든 것이 다 그 분의 것이듯이(욥 41:11)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을 행함은 불가능하니 그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사(호 2:19) 자신의 의로써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시면(사 59:15-16) 의인도 없을뿐더러 행위의 의도 없다. 오직 택하심을 받은 성도만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는다(벧전 1:2). 이렇듯 ‘순종함’도 은혜의 선물이다(3.14.1-6).

네 번째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순결한 생활을 하며 마음을 다하여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성도들도 여전한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계속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선만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 7:20; 왕상 8:46). 그러므로 계속해서 허물을 사함 받고 죄가 가려지는 복을 평생 받아야 한다(시 32:1; 롬 4:7). 하나님 앞에서 한 번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이제 자신의 선행의 공로로 상급을 받는다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오직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만이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서 역사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영원한 중보자(perpetuus mediator)가 되심으로 그 분의 죽음이 영원한 작용(efficacia perpetua)을 하기 때문이다. 즉 죄 씻음(ablutio), 무름(satisfactio), 속죄(expiatio), 그리고 종국적으로 우리의 모든 불법을 가리는 완전한 순종(obedientia)을 실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롬 4:3). 믿음의 의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공로가 없다(엡 2:8-9).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성도에 관하여서도, 우리는 율법의 ‘행위’(opus)가 아니라 그 ‘계명’(mandatum)을 헤아려야 한다. 율법의 가르침은 선하나 그것을 행함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3.14.7-1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는 칭의와 성화에 모두 미친다. 양자를 분리하면 우리는 단지 ‘불구(不具)가 된 믿음(mutila fide)’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롬 3:22, 주석).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고유한 가치는 없지만 은혜를 받아들이는 공로가 있다고 본다. 행위의 의는 완전하지 않으나 그 불완전함이 은혜를 받는 ‘잉여 행위’(opera supererogationis)에 의해서 보충된다고 한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은혜’(gratia acceptans)에 공로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인’ 은혜 아닌가?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진대, 어떻게 갚고 남는 행위의 공로를 기대할 것인가? 우리가 먼저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는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른다. 그러므로 굳이 행위의 보속(補贖)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편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편의 무름에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도 단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여야 한다(눅 17:10). 우리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다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해야 할 것을 행한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것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순종하는데 그치는 지상의 삶 가운데서 어느 성도가 잉여 공로를 말할 것인가? 우리의 선행조차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예의 소유물과 다름없다. 마땅히 그것은 주인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의를 믿어서도 안 되며 그것을 자랑해서도 안 된다(3.14.12-16).


2. 행위의 공로 없음

성도의 영생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굳이 철학자의 논법을 들어서 설명해 본다면, 구원의 동력인(causa efficiens)은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사랑 즉 자비이시다. 구원의 형상인 혹은 도구인(causa formalis sive instrumentalis)은 믿음이다. 구원의 질료인(causa materialis)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라는 말씀은 이러한 세 가지 원인들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인(causa finalis)는 여호와의 일을 인정하고 그 분께 영광을 올려드림에 있다.

사도 바울은 성부의 은혜가 동력인, 성자의 공로가 질료인,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은 믿음이 형상인, 이로써 삼위 하나님께 찬미를 돌림이 목적인이 됨을 말씀 가운데 수차 증언하였다(롬 3:23-26; 엡 1:3-14).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이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causa inferior)으로 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의 행위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총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한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심은 오직 은혜를 원인으로 삼는다. 하나님께서 행위를 요구하시되 오직 은혜로 이루신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 성화, 영화 사이에는 시간상 전후가 있으며 각각의 과정에서 성도의 거룩함이 요구되지만 오직 이전의 은혜가 이후의 은혜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사랑하시되 자신의 것으로서 사랑하신다(3.14.17, 20).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증언한다(엡 3:19).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dona Dei)로서 그 분의 선하심을 깨닫게 하며 소명의 표(vocationis signa)로서 그 분의 택하심을 돌아보게 한다. 오직 은혜, 전적 은혜를 노래한 어거스틴에 귀 기울이자.

“저는 제 손의 일들을 천거(薦擧)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보시고 공로보다 더 많은 죄를 발견하실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가지 저는 다음을 말하고, 바라고, 간구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제 속에서 제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보시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정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에 면류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저에게 선행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3.14.19-20).

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고 ‘믿음’에 국한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분에 대한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우리에게 아무 공로가 없음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충분한 공로이다.’ 선행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의 편에 있다. ‘행위에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행은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우리에게는 ‘무익하지 않다’(nec infructuosa). 사람이 ‘보상’(remuneratio)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께서 그런 ‘값’(pretium)을 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선행은 현세의 삶 가운데 보상을 받으며 믿음은 영생으로 천상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구별하는 것은 허망하다. 우리는 오직 그 분 앞으로 나아감으로(사 55:1) 모든 것을 받아서 풍족히 누리게 된다(마 25:29; 눅 8:18).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 위에도 영예를 더하시니, 은혜로 주신 것들을 조건으로 상급을 더하신다(1.15.1-4).

로마 교회 신학자들은 사랑을 행하는 믿음(fides formata, 내실적 믿음)만이 성도를 의에 이르게 하는 공로가 있다고 하여서 ‘모든 경건의 개요’(pietatis totius summa)인 ‘이신칭의’(iustificatio fidei) 교리를 폐기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선천적인 능력으로 자유의지 가운데 선행의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 거듭난 사람 외에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자에게만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엡 2:10; 요일 3:8-9). 진정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서(롬 11:19) 그 분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거듭난 사람(롬 8:17; 갈 4:5-7),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만이 그 분의 생명을 몸에 나타내며(고후 4:8-10) 그 분의 형상을 본받아(롬 8:29) 지식과 의지에 있어서까지 새로워져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좇는다(마 16:24; 눅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의’(iustitia)와 ‘구원’(salus)이 되셨다. 그 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의와 구원에 이를 ‘능력’(facultas)을 주신 것이 아니셨다. 그 분께서는 친히 생명으로서 생명의 의를 이루셨으므로 믿음으로써 그 의를 전가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요일 5:12, 24; 6:40)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딛 3:7; 롬 5:1-2).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로를 얻을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공로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외계적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심으로 그 속에 사심으로써(요일 3:24) 성도를 자신과 함께 하늘에 앉히시고(엡 2:6) 자신의 사랑의 나라의 상속자가(골 1:13) 되게 하신다(3.15.5-8).


3. 행위도 의롭다 받으심

칼빈은 성화를 선행이라는 측면에서 다룬다.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 있지만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즉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sapientia)와 의로움(iustitia)과 거룩함(sanctificatio)과 구원함(redemptio)’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거룩함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듯이(고전 1:13) 칭의와 성화도 나눌 수 없다. 그리스도께 ‘참여함’(participatio)은 의와 함께 거룩함도 포함한다(3.16.1).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삼으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부르셔서 그렇게 살도록 이끄시기 위함이다(살전 4:3, 7; 딤후 1:9). 죄에서 자유하게 하심은 의에 순종하게 하려 하심이다(롬 6:18).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정결케 하여(요일 3:3; 고후 7:1) 주님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벧전 2:21; 요 15:10; 13:15).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롬 6:4, 6). 그러므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요일 4:14; 요 13:34).

거룩함은 이웃 사랑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마 5;16). 주님께서 우리를 헤아리심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경외케 하려 하심이다(시 130:4).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의 제물로 드리자(롬 12: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은 우리 편에서는 값 없는 은혜지만 주님 편에서는 ‘가장 거룩한 피’(sacratissimus sanguis)를 흘리셔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3.16.1-4).

복음의 약속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만든다. 거듭난 사람의 행위도 완전치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가치 그 자체를 헤아리시기 보다는 자신의 긍휼하심과 선하심으로 그것을 자신의 영광의 자리 편으로 끌어당기신다(3.17.3).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게 된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3.17.10).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받으심’(acceptio)으로 우리의 행위도 인정을 받게 된다(행 10:35; 벧전 1:17; 2:15).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사시므로 우리 안의 선한 일을 사랑으로 포용하시지 않을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신께서 주신 행위조차도 받으신다”(3.17.5)

주님께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의 언약을 이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신 7:9; 왕상 8:23; 느 1:5) 자신의 은혜로 성도의 삶을 친히 인도하시겠다고 계시하셨다. 율법에는 이미 ‘복음적 약속’(evangelica promissio)이 언약 가운데 지시되어 있다. 복음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성취를 전한다(3.17.6-7). 성도들의 행위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은 즉 의로 인정됨은(롬 4:22) 그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함’(perfectio)으로 덮이고 그 분의 ‘순결하심’(puritas)으로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3.17.8).

율법 자체에서 의를 이룸이 불가능하다. 아무도 하나님의 법을 자체로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롬 2:13). 믿음의 행위는 은혜의 열매이지 율법의 의를 이룸이 아니다. 다만 믿음이 행위로 공표되기 때문에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불린다(약 2:14-26). 그러므로 행위자에게 값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그 행위도 아무 가치가 없다(3.17.11-15).

행위의 의에 ‘값’(preces)이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믿음에도 보상이 따르는 공로는 없다. 믿음은 단지 ‘도구’(instrumentum)에 불과하다(3.18.8). 오직 값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종들의 삯(servorum stidendium)이 아니라 아들들의 기업(filiorum haereditas)이다’(3.18.2).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주 안에서 마지막까지 이루신다(빌 1:6). 다만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거룩함에 이르게 하신다(롬 8:30).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상’(praemium), ‘보상’(merces),‘보수’(retributio)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복’(beatitudo)이다(3.18.1, 4).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대한 값을 은혜로 치르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나 그것에 대한 상급을 마치 빚을 갚듯이 하신다(잠 19:17). 우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마 19:17). 그런데 그 생명이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로 수여되지 않았는가(3.18.6-7,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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