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신앙 대탐험 / 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4. 칼빈의 흔적을 더듬다 (2)오를레앙·부르주

[칼빈 500주년 기념 특별기획] 

유럽 최고 오를레앙·부르주 대학서 깊은 학문세계 펼쳐
‘은사’ 볼마르 교수에게서 큰 영향…후계자 ‘베자’ 첫 대면

 

▲ 칼빈은 오를레앙대학에서 볼마르 교수한테 신약성경 원문을 배웠고, 다른 헬라어 책들도 탐독했다. 사진은 오를레앙 상징인 대성당.

 

수척한 몸을 이끌고 아침 8시 미니버스를 타고,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500년전 어린 칼빈을 떠올렸다.

14살 어린 소년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누아용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리고 마르쉐 대학교에서 라틴어와 정통 프랑스어를 수학하고 악명 높은 몽테규 대학교에서 인문학 공부를 심화했다. 이 기간에 칼빈은 누구보다도 노력하여 라틴 고전, 논리학,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강독하여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요청에 부응하여 신학 대신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를레앙 대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흥미로운 것은 루터는 그의 아버지가 법학 공부를 요구하자 그것을 거부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지만, 칼빈은 고분고분하게 순종했다는 점이다. 아마 칼빈 자신도 당대 최고의 학문으로 부상한 법학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

 

▲ 부르주 에띠엔느 대성당.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의 향연을 만끽하며 오를레앙으로 간다. 오를레앙은 백년전쟁(1337~1453) 당시 영국군의 수하에 있다가 프랑스의 영웅인 잔다르크가 활약하여 영국군을 퇴각시킨 지역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세계 3대 전쟁으로 평가받는 갈리아 전투에서 알렌시아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의 탄생을 알린 지역이기도 하다. 그만큼 역사적인 곳이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루터를 지지하는 볼마르 교수한테 신약성경의 원문을 배웠고, 다른 헬라어 책들도 탐독했다. 이곳에서 그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법학 선생으로 통했고, 교수들이 결근하는 날에는 대신 강의를 맡기도 하여 유명세를 치렀다. 당시 오를레앙 대학은 부르주, 뚤르주와 함께 ‘교회역사에서 프랑스 왕국 전체로 흘러넘치는 세 개의 우물과 같다’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명문이었다.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서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이곳에서 머물고 개혁을 논의했다.

오를레앙 대성당이 위치한 뽀티에 거리를 중심으로 천천히 걸었다. 칼빈이 살았던 집 근처를 배회하며 흔적을 더듬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위그노들이 핍박을 받으며 예배를 드리던 그홀로 호텔도 찾아갔다.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 에티엔 돌레의 반신 동상이 정원에서 반겼다.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볼마르 교수한테 공부한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고린도후서 주석〉에 “선생님의 지도로 법률 공부와 그리스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헌사를 드릴 정도로 영향을 깊게 받았다.

1529년 볼마르 교수가 신설 부르주 대학의 학장으로 옮겨가자 칼빈도 초빙을 받아 그곳 법대로 등록한다. 부르주 대학은 나바르 왕국의 여왕 마그리트의 지원을 받아 16세기 종교 개혁의 새로운 붐을 조성한 중심지이다. 마그리트는 인문주의자였으며 위그노들을 보호하는 진보적 종교 사상을 가지고 있어 많은 개혁자들이 부르주로 몰려들었다.

 

▲ 칼빈이 살았던 부르주 골목길.

 

다시, 칼빈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길을 밟는다. 프랑스에서 10년간 공부했다는 가이드는 부르주를 처음 방문한다며 이해를 구했지만 지독히도 길눈이 어두웠다. 운전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성 에띠엔느 성당과 부르주 대학을 찾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1324년 순교자 스데반에게 헌정된 에띠엔느 대성당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위용이 있고 섬세했다. 뭔가 다르다 했더니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란다.

칼빈은 대성당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성당 아래에 위치한 대학에 볼마르 교수의 강의실이 있었다. 이곳의 법학부와 신학부는 루터교의 온상지가 되었고, 종교 개혁을 확산시키는 모판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볼마르 교수 집에서 12살의 소년 테오도르 베자를 만났는데 훗날 그가 동역자이며, 후계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베자는 이곳에서 5년간 공부했다. 1534년 프랑수와 1세가 포고령을 내리자 볼마르 교수는 독일 튀빙겐 대학으로 떠나고, 베자는 오를레앙으로 돌아가 4년간 더 공부한 뒤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부르주에서 칼빈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칼빈홀’과 고덴 광장에 서 있는 ‘칼빈돌’ 들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칼빈의 다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칼빈은 부르주에서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종교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정설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1531년을 전후하여 칼빈이 회심했을 것으로 본다면, 오를레앙과 부르주의 생활은 개혁주의자로서 그의 이 일생에 커다란 밑거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오를레앙과 부르주의 정취에 취한 이틀도 잠깐, 우리는 내년에 이곳을 다시 둘러볼 것을 다짐하고 파리로 향했다. 부르주에서 파리로 달리는 차 안에서 보는 저녁노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