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교통하다

죄사함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에 서게 돼


[제19강좌] 이신칭의(以信稱義):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기독교강요 3.11.1-3.13.5)


1. 의롭다 칭하며 받아주심

이신칭의(iustificatio fide)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하심으로써 성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이다(3.11.2). 칭의된 성도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옷 입혀져’(vestitus) 그 분과 교제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3.17.8). 성도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그리스도를 붙잡고 소유하게 된다.

믿음에는 ‘이중적인 은혜’(gratia duplex)가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단지 심판주가 아니라 호의를 베푸시는 아버지로서 그 분을 두게 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거룩하게 됨으로써 흠 없고 순결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전자의 은혜를 칭의, 후자의 은혜를 성화라고 부른다. 칼빈은 행위가 결여된 참 믿음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와 중생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논한 후 이어서 칭의를 다룬다. 믿음으로 값 없는 죄사함을 얻음이 모든 구원 과정의 기초가 됨으로 칼빈은 칭의를 ‘종교가 축으로 삼는 문지도리’(cardo religionis)라고 불렀다(3.11.1).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iustificatur) 사람이 ‘의롭다고 여겨진다’(iustus habetur). 의롭다고 칭하여 ‘받아주심’(acceptio)에는 은혜를 주심이 함께 한다. 따라서 칭의는 ‘죄사함’(remissio peccatorum)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ustitiae Christi imputatio)를 포함한다(3.11.2).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책’(reatus, 형벌)을 없는 것으로 해주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재’(intercessio)로 말미암은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의롭지 못한 우리를 그 분 안에서 의롭게 여기심을 뜻한다. 곧 칭의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법정적(法定的)으로 선포하심에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이 구약의 아브라함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전하였다(갈 3:8).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3:26).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롬 8:33-34). 죄사함은 죄를 ‘방면함’(absolutio)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인한 보상, 배상, 속상 즉 ‘무름’(satisfactio)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이 사람을 힘입어’(행 13:38)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다(3.11.3).

로마서 주석에서 칼빈은 믿음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여서 그 분의 의와 교통할 수 있게끔 하는 도구’라고 정의한다(롬 3:22, 주석).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중생의 시작으로부터 영생의 삶에 동참하는 때까지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교제’(communio cum morte Christi)라고 역동적으로 파악한다(롬 6:7, 주석). 칭의는 단회적이다. 그러나 그 의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서 역사한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는 ‘우리 자신과 구속주 사이에 서로 유사한 것을 찾고 이에 응답하는’ 과정이라고 불린다(롬 6:10, 주석). 이는 칭의의 선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질’(qualitats)이 아니라, ‘그저 전가해 주신 의’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만 역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롬 5:17, 주석).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신 뜻대로 예정된 자들이 독생자의 그저 주시는 은혜를 찬미토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받아주심’(acceptio)이다(엡 1:5-6). 칭의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즉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의 복’,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의 복이다(롬 4:6-8).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 안에서 ‘의’가 되게 하려하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다(고후 5:18-21). 이렇듯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책을 사함과 함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심을 포함한다(3.11.4).


2.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믿음의 의’(iustitia fidei)는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 cum Deo)이며 오직 이 화목 가운데 ‘죄사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심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 분께서 얼굴을 가리셨기 때문이다(사 59:1-2).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은 죄에 대한 진노를 거두시고 원수 된 자들을 자녀로서 자신과 화목하게 하심이다(고후 5:8-11).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먼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이후에 그 영의 역사에 따라 행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의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되어 교통됨으로써 우리가 값 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침을 받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가는 자리에 서게 된다. 곧 칭의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의 ‘교통’(communicatio)에 다름 아니다(3.11.21-23).

오시안더(Andrea Osiander)는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서 찾지 않고 그 분의 신성이 우리의 본성과 혼합됨으로써 야기되는 본질적인 변화라고 본다. 오시안더는 칭의를 하나님의 ‘본질’(essentia)과 ‘속성’(qualitas)의 ‘주입’(infusa)으로 인하여 사람이 신의 본성에 참여함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질을 우리 안에 주입하심으로써 갖게 되는 이러한 의를 오시안더는 ‘본질적 의’(iustitia essentialis)라고 불렀다. 이렇듯 칭의를 자질의 변화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의롭다 하심’을(롬 4:4-5; 8:33) ‘의롭게 만드심’으로 이해한다(3.11.5-6). 그리하여서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또한 믿음을 단지 형상인(形相因)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 자체를 자질을 얻는 또 다른 자질로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을 혼동하게 된다(3.11.7). 칭의는 신성을 주입 받아서 신화(deificatio, 神化)가 됨이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로 다 이루신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그 분의 신성을 주입받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의’가 되심은(렘 51:10; 23:6; 33:16) 그 분의 신성을 부어주심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사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행 20:28). 그리스도께서는 신인양성에 있어서 ‘의로운 종’이 되신 것이지(사 53:11) 단지 신성에 있어서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었다(3.11.8).

하나님의 아들께서 ‘한 사람’으로 오셔서(롬 5:19) 종으로서 순종하심으로써(빌 2:7) 우리가 그의 안에서 의가 되게 하셨다(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과 영생하는 음료가 되심으로(요 6:48, 55) 우리가 그 분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중보자의 신인양성 위격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열려있는 샘’(nobis expositus fons)이 되셨다. 그러므로 신성만의 중보를 주장하는 오시안더의 입장은 용납될 수 없다(3.11.9, 12).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 입으며 그 분의 몸에 접붙임을 받기 때문에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으로 그 분의 의와 교통한다.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을 주입받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써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다. 칭의는 의의 ‘본질적 내주’(essentialis habitatio)가 아니라 의를 전가하심으로 의롭다 하심이다(3.11.10-11).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그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다(롬 4:2-8). 복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를 가르친다(롬 1:17; 3:21, 24, 28).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니 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롬 3:24).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기 때문에(갈 3:21-22)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3.11.19).

행위가 귀한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심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와 별도로 믿음을 의롭다 보신다(롬 4: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의롭게 한다(갈 5:6). 이는 믿음이 사랑으로 말미암는다거나 믿음과 사랑이 함께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참 믿음에는 사랑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일을 헤아리는 자는 자신의 공로를 빚으로 헤아리기 때문에(롬 4:4) 순수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3.11.20).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다(롬 10:3). 그리하여서 여전히 자신의 행위를 자랑함으로써(롬 4:2)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은혜를 믿는 믿음에서 멀어져 있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3.11.13).

로마 가톨릭 궤변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가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행위’(opera)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이러한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가 그 믿음으로 선행을 함으로써 의에 이르게 된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간접적으로만 전가됨을 주장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뢰함이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로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양자 모두 선행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만 칭의에는 하나님의 공로가 합력적으로 역사하나(meritum de congruo) 성화에는 합당하게 역사한다는(meritum de condigno) 측면에서만 다르다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칭의에서는 조력하실 뿐이며 성화에서는 계수하실 뿐이라고 본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게 함과 동시에 선행을 함으로써 의에 이른다고 가르침으로써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에 자신이 서 있음을 분명히 했다(3.11.15).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것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 3:11-12; 합 2:4). 율법의 의에는 행위가 필요하나 믿음의 의에는 행위가 필요 없다. 율법의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롬 10:5). 그러나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만(롬 10:6) 구원에 이른다(3.11.17-1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의의 조건을 찾으신다. 그리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다 이루게 하셨고 그 의를 다 전가해 주시는 중보를 계속하게 하셨다(3.11.14, 16).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말미암는다. 믿음에 행위를 더함은 믿음을 부정함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3. 법정적 칭의

버나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쉴 곳이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구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라고 그는 외쳤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공로가 넉넉지 못함을 아는 것이 공로로서 넉넉하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로서 넉넉하므로, 공로가 없음이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3.12.3).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인생이 아무도 없다(시 143:2). 사람 앞에 옳다함을 받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눅 16:15). 자책할 아무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전 4:4). 칭의는 ‘인간의 법정’(humanum forum)이 아니라 ‘하늘 심판대’(coelestis tribunal)에서 옳다함을 받는 것이다. 주께서 헤아리시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시 130:3). 사람은 다 악을 짓기를 물을 마심과 같이 한다(욥 15:15-16). 누가 하나님 앞에 순결함을 자랑하며(욥 25:5), 밝음을 자랑하겠는가(욥 3:9)? 그러므로 행위를 두고 하나님 앞에 변론할 자 아무도 없다(3.12.1-2).

하늘 심판좌 앞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한낱 더러운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는 심령을 감찰하신다. 그러므로 사람 보기에 정직하거나 깨끗한 행위라도(잠 21:2; 16:2) 모두 더럽고 가증스러울 뿐이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겠는가(욥 14:4)?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겸손’(humilitas)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해야 한다. 오직 교만한 자는 버려지나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은 남아 보호를 받는다(습 3:11-12). 그러므로 ‘모든 교만’(arrogantia)과 ‘자존감’(securitas)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고 바라는 자만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3.12.3-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신다(롬 3:25-26).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 안에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오직 우리의 ‘의’가 주님의 소유물임을 자랑해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믿음조차 선물로 주신다(엡 2:8-9).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만약 우리의 행위의 공로가 조건이 된다면 믿음의 의는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롬 4:14).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참 평강이 있다(3.13.1-3). 믿음이 없으면 약속이 무용하다. 오직 하늘의 ‘기업’(haereditas)은 믿음으로부터 온다. 믿음은 진리를 확신함에 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는 함께 역사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원협약에 따라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심 아닌가? 우리로서는 모두 멸망의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니(마 19:25-26) 스스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심으로 인한다. 오직 믿음의 의는 그저 주시는 전가의 의니 아무도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롬 8:35).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된다’(3.13.4-5). 그러므로 전적인 은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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