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신앙 대탐험 / 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3. 칼빈, 세계를 감화시키다 (6)한국 칼빈주의

[칼빈 500주년 기념 특별기획]
선민사상으로 자긍심 심고 성장축복 동력으로
무뎌진 성경적 가치 실현에 칼빈정신 회복 절실

한국 장로교의 성격은 ‘칼빈주의’라는 말 가운데서 합당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칼빈주의가 “오직 기록된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scripta)” 라는 개혁주의의 고유한 기치(旗幟)를 과연 제대로 선양(宣揚)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칼빈주의는 1880년대 미국 장로교를 비롯한 장로교에 속한 각 교단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래해 주는 과정에서 함께 유입되었다. 그리고 한 세기를 넘어 사반세기를 거의 지나는 동안에 한국교회는 많은 성장을 거듭했으며 그 축복의 동력을 칼빈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경적 신앙과 하나님의 전적인 축복으로 돌리고 있다. 칼빈주의는 교회 성장뿐만 아니라 실로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전적으로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칼빈의 예정론, 성경중심주의, 영역주권사상은 한국교회의 특징을 이뤘고, 한국교회가 역사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사진은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행사 모습.
첫째 칼빈주의는 한국교회에 예정론적 선민사상을 갖게 했다. 우리나라 국호인 ‘조선(朝鮮)’을 영어로 ‘Chosen(정해진)’이라고 표기하고는 하나님이 말세에 한국교회를 선택하여 주셨다고 설명했고 그것이 성도들에게 수용되었는데 이는 한국 성도들이 가진 선민사상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예라 할 것이다. 이러한 선민사상은 일제와 한국전쟁 등 지난(至難)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며 또한 그들이 자긍심을 갖고 부지런히 전도활동을 하는데 큰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칼빈의 예정론은 모든 사람은 영원 전부터 구원 또는 파멸로 작정되었다는 교리로 수립되었다. 한국교회는 예정론과 함께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도의 견인(牽引) 사상을 혼합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선택됐으며 한번 택함을 받은 자로서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결과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과 교회에 대한 긍지 가운데서 세계 어느 나라 성도들보다도 교회에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둘째 칼빈주의는 교회를 성경 말씀 위에 수립했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특별히 부어주신 은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칼빈주의가 신학으로서 전래되기 전에 우리말 성경이 존재해왔기 때문이었다. 성경에 대한 각별한 애착에다가 오직 성경을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여기는 칼빈주의의 가르침이 더해져서 한국교회는 말씀을 모든 것 위에 두고 특별히 강조하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는 성경책을 단상 위에 놓고 있으며, 성경 말씀을 강조하기 위한 조형물들을 교회 안팎에서 볼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사랑은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교역자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이어져 교역자는 ‘목자’요, 성도는 ‘양’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게 했다.

셋째 칼빈주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확산에 기여했다. 칼빈은 교리연구가요 설교가요 주석가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하여 성도의 삶을 통하여 사회개혁에 이루기에 주력했다. 그는 기독교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다윗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상의 백성이 다스림 받는 세상을 이루고자 말씀 선포와 전도와 적용에 헌신했다. 참다운 기독교인의 신앙은 단지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의 윤리는 관념적이거나 수행적인 개인적인 삶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전반에 미치는 생활 윤리가 되어야 함을 부각시켰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전통에 따라 국난에 처한 민족을 구하고자 애국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또 인재를 길러내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기울어가던 한국사회에 희망을 주는 등불 역할을 했다. 청교도 전통을 이어받아 기독교인은 정직하고 음주 흡연을 멀리하는 등 생활이 건전하며 직업에 대한 천부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인식되도록 했다. 이러한 정신은 건전한 사회 건설에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 등을 위시한 정치사회적 활동을 통하여서 일본제국주의 및 독재정권에 항거하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칼빈은 교회 내적 개혁을 주창했다. 당회를 두어서 교회의 치리와 중요한 결정을 목회자 혼자서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노회를 두어서 목회자의 치리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총회에 권력으로 대표하는 장을 두기 보다는 실무적인 총무로 하여금 총회 결정 사항을 집행하게 했으며, 장로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교회는 부단히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는 기치 아래 한국교회는 개혁의 운동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초창기 칼빈주의 정신을 많이 잃어버렸다. 말로는 ‘칼빈주의’를 외치지만 칼빈주의적 성경관에 입각한 삶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면이 적지 않다. 지나친 선민의식은 불신자는 물론, 타교파의 교인들까지 포용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정죄하기에 익숙해져 분리와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삼았던 아름다운 전통이 오히려 말씀 해석에 대한 아집의 쓴 열매를 맺기도 했다.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은 또한 수많은 이단들이 자생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도 했다. 교회 안의 분쟁이 생길 경우, 저마다 자신들의 신념을 절대시함으로 대화와 타협의 틈을 주지 않았다.

한국 교회는 사회를 건전한 사상으로 이끌던 자리에서 이제는 사회의 그늘 아래서 심지어는 조롱을 받는 지경까지 다다랐다. 초창기 한국교회가 비록 교세는 약했으나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성경적 가치를 구현하려고 했고, 교회 자체의 부흥보다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염려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다수의 한국교회는 개교회의 부흥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사회는 한국교회가 자기들끼리는 어리석을 정도로 관대하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치부하게 되었다. 더불어 칼빈이 구현하려했던 교회 안의 건전한 정치는 도외시되고, 교권의 독점화를 희구하며 마치 세속의 권세를 추구하듯이 교권 투쟁에 몸을 던지는 불미스런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는 칼빈이 구현하려 했던 성경적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모습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절실하다. 다행히 한국교회는 최근 들어 대사회 봉사운동에 열심을 다하며 연합 사업으로 이를 수행하려는 시도들을 계속하고 있다. 칼빈은 가시적 교회와 함께 비가시적 교회를 강조하였던 바, 비가시적 교회의 일치와 가시적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한국의 칼빈주의자들]

북미 선교사 활동서 시작
박형룡·박윤선 꽃 피워

한국의 칼빈주의는 북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북미대륙은 19세기를 휩쓸었던 선교운동의 열풍 가운데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언급된 것은 1900년대 초반 평양신학교의 교회사 수업에서부터였다. 칼빈주의에 관련된 최초의 논문은 1924년 김인영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었으며 신학지남이 1934년 최초로 칼빈 특집을 담았다. 최초의 단행본은 1936년 김태복의 ‘칼빈의 생애와 그 사업’이었으며, 〈기독교강요〉는 1964년에야 비로소 신복윤, 한철하에 의해 번역됐다.

칼빈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 이후로 이때부터 수많은 학위논문이 쏟아져 나왔으며 칼빈주의연구원(원장: 정성구), 한국칼빈학회(회장: 이양호) 등 관련 기관과 학회들이 탄생하게 된다. 한국의 칼빈주의는 일제강점기와 전쟁 등의 혼란했던 시대를 지나 한국사회가 도약과 안정기로 접어들었던 상황과 맞물려 조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칼빈에 대한 연구와 적용은 더욱 심화, 확산되고 있다.

초창기 칼빈주의를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뿌리내리게 한 공로는 박형룡과 박윤선에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박형룡은 1937년 로레인 뵈트너(L. Boether)의 〈칼빈주의 예정론〉을 칼빈주의 신학에 관한 최초의 역서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예정론을 비교하면서 상술했다.

한편 박윤선은 강의와 저술, 그리고 주석발간을 통해 한국교회에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을 소개하고 체계화했다. 특히 그는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을 접하고 이를 한국에 소개한 실제적인 첫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또 1979년 신구약 주석을 칼빈주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완간했다.

박형룡, 박윤선의 칼빈주의 신학 전통은 특히 총신대신대원을 중심한 합동측에 큰 영향을 끼쳤고 교단적 색깔을 선명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들의 신학은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전수되어 오늘날도 활발히 신학의 꽃을 피우고 있다. 작금 교회의 목회와 강단에서도 칼빈주의에 기초한 말씀중심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지난 세기 말의 오순절주의와 문화주의를 넘어서서 개혁주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새로운 바람을 잔잔히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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