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창기 혜린교회 예배모습. 비좁은 예배당이었지만 성도들은 꽉 찼고 열정도 뜨거웠다.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교회성장


1980년 10월 25일 주일 오전 11시에 개척 첫 예배를 드렸다. 인천에 사는 누님, 매형(현재 윤지호 안수집사), 어린이들(영라, 영권), 사모 등 여섯명이 예배를 드렸다. 믿는 사람은 나와 사모뿐이었다. 그때 설교한 본문이 시편 121편이다. “지금은 이렇게 초라하지만 두고 보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우리 교회는 크게 부흥할 것이다.” 

첫 예배를 이렇게 마치고 난 다음 주일에 서울 이문동에 사는 어떤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예배에 참예했다. 그녀는 내 아내가 자주 가던 보세품 옷을 파는 작은 가게를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단골 아가씨가 전도사하고 결혼하고 교회를 개척할 것이라고 하니까 인사로 한번 와 봤는데 마침 그날 설교가 ‘예수님의 피’에 대한 것이었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말이 교회는 멀어서 나올 수 없지만 십일조는 우리 교회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부터 그녀는 계속 먼 이문동에서 부천까지 어린아기 둘(윤진이, 장원이)을 데리고 세 번씩 차를 갈아타면서 나왔다. 어떤 때는 늦어서 예배 중간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녀가 현재 여영숙 권사인데 그때 나이가 30세 였다. 그리고 매달 십일조를 했는데 그것으로 월세 14만원씩을 충당했으며 그 후 5년 동안 그녀의 헌신과 물질적 봉사로 인해서 우리 교회는 큰 도움을 받았다. 교회에 돈이 없어서 월요일이면 “이 한 주간을 어찌 살지” 하고 멍하니 있거나 돈 쓸 일이 생길 때는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목사님 돈이 좀 생겼는데 교회에 돈 쓸 일이 없습니까?” 이런 그녀의 헌신으로 혜린교회는 점점 자리를 잡아 갔다.

교회를 개척하고서 생각하기를 그 해가 가기 전 두 달 동안에 예배출석인원 700명을 돌파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참으로 개척이 얼마나 어려운 줄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격이었다. 그런데 700명을 얻기까지 거의 십년이 걸렸다. 그래서 나의 교만함이 많이 깨졌는데 나와 아내는 매일같이 전도하러 다녔다. 그리고 교인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매일 저녁 기도회로 모이고 그들을 데리고 전도하러 다니기를 칠년을 계속했다. 눈이 오나 비가오나를 물론하고 공식예배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전도하면서 보냈는데 전도를 하지 않는 날은 잠을 재우지 않으셨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인들이 70명 100명 200명 400명 1000명 2000명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 많은 사연이 있으나 지면이 한계가 있어 생략한다. 예배당도 넓은 70평짜리 2, 3층을 임대했고 그 임대교회에서 교인 숫자가 2000명이 넘어섰던 것 같다. 그래서 예배를 4부로 드렸는데 한번은 세어보니 650명이 한 번에 예배드리기도 했다. 그래서 부실한 건물이 무너질까봐 절대로 발을 구르거나 의자를 흔들며 통성기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초기의 일 년 정도를 어렵게 보냈으나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상당히 큰 교회가 되어 있었다. 그저 전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시키고, 나도 매일 기도를 몇 시간씩하고 사람만 오면 구원론 교육으로 초신자 교육을 철저히 한 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 주께서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 주신 것이 참으로 감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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