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강인춘

1928년 조선예수교 농우회(農友會) 발기총회(제17회 총회회의록 11쪽)가 발족됐다. 이후, 기독청년들이 중심이 된 농촌사업 연구모임인 농우회를 일제가 탄압하면서 농촌사회운동에 임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검속한 농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1938년 6월 유재기 목사가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정일영 조기철 박학전 이유택 송영길 주기철 목사 등이 체포되었다. 농촌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가 죄목이었다.

이들이 지속한 농촌운동은 당시 피폐된 농촌의 문제를 기독청년들의 신앙적 결속으로 타개하는데 있었는데, 이것은 일제로 하여금 중요한 민족세력의 하나로 지목되는 일이었다. 특히 이 사건을 확대한 일제의 처사는 이를 빌미로 기독교농촌운동 세력과 청년민족지도자들을 멸절시키려 한 것으로, 사건 구성의 내용에 있어서 날조된 성격이 강하다(기독교사전).

유재기 목사가 시무했던 경북 의성읍교회가 소속된 경중노회 100회사에는 1939년 7월 유재기 목사가 농민 복음운동인 농우회 사건으로 박대환 등 많은 성도들과 함께 의성경찰서에 검거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의 연루자로 몰아 평양의 주기철 목사와 송영길 이유택 박학전 목사 등을 그 해 8월에 검속했다가 안동 군위 청송경찰서에 유치시켰다.

이들은 검속 7개월 만에 유재기 목사만 기소되어 2년 징역을 살게 되고 나머지는 1940년 2월에 석방되었다. 7개월간 검속당한 중에 주기철 목사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곳이 의성경찰서였고 박학전 목사는 고문 끝에 정신 이상이 되어 폐인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경중노회 100회사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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