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의미를 찾아서(장세훈 지음/그리심 펴냄)

철지난 유행을 최신이라 고집하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때 풍미했던 ‘역사비평’을 성경해석학의 절대적 도구마냥, 현학적으로 으스대니 꼴불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본문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질문한다. 이 문제와 관련한 (구약) 성경해석학 논쟁에서 현재 최고 정점에 있는 두 학자, 브레바드 차일즈와 월터 브루그만의 입장을 먼저 검토한다.

이 문제에 대한 차일즈의 대답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본문의 의미는 본문의 최종 정경 형태의 신학적 맥락에 의해 결정되며, 성경해석의 주요 임무는 본문의 의미와 메시지를 찾기 위해 최종 형태로서의 정경본문과 그 신학적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데 있다.” 브루그만의 대답은 차일즈와 확연히 다르다. “구약본문은 다원적 소리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해석이나 방법론도 다원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해석은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며, 본문의 의미와 영감은 해석의 과정 속에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통해 언제나 새롭게 전달된다.”

정경의 최종 형태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차일즈와 독자의 해석학적 상상력에 따라 얼마든지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브루그만, 두 학자 사이에 오간 논쟁이 얼마나 날카로웠을지 짐작이 간다.
차일즈의 약점은 브루그만의 지적에서, 브루그만의 약점은 차일즈의 지적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두 사람의 주장과 둘 사이에 오간 논쟁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장 교수는 둘의 장단을 이렇게 평가한다.

“차일즈의 본문해석은 본문 배후의 세계에 초점을 둔 역사 비평학자들과 본문의 신학적 측면을 놓친 문학 비평학자들에게 최종 정경 본문의 신학적 맥락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해석학적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차일즈의 정경적 해석은 본문의 권위와 그 의미를 최종 정경 형태로 제한시킴으로써 독단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다. 또한 브루그만은 차일즈의 독단적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해석의 주관성과 해석학적 상상력을 강조했지만, 본문의 의미가 비결정적이라는 포스트모던적 경향을 수용함으로써 해석학적 상대주의의 늪 속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둘의 장단을 파악한 저자는 본문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가? 장 교수는 차일즈의 ‘정경의 최종 구성 형태’와 브루그만의 ‘독자의 역할’이 성경해석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구약해석은 본문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서 ‘저자의 의도’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물론, 장 교수는 저자의 의도를 찾기 위해 본문 자체보다는 본문 배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치중했던 역사비평적 해석은 “결코 바람직한 해석적 태도가 될 수 없다”고 전제하며, “오히려 저자의 의도는 재구성된 본문 배후의 역사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를 통해 발견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의 작은 제목은 ‘21세기 구약신학과 해석’이다. 역사비평이 위기로 몰아간 성경신학의 자리매김을 문제 삼은 연구인 것이다. 장 교수는 이 문제제기에 이렇게 반문함으로 답한다. “‘저자의 의도’와 ‘본문이 의미했던 바’를 찾고자 했던 성경신학의 정신은 여전히 성경해석의 주요 목표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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