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상임지휘자 입사 후 35년만의 은퇴…한국 합창지휘 대부 탁월한 교수법으로 세계수준 합창단 만들어…“음악 기초는 교회”


뒤로 빗어넘긴 흰 머리카락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큰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은 방 안에 온통 아침의 활력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이 작업을 하던 책상에 앉아 악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던 난(蘭)들이 궁금한 듯 그의 어깨 뒤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아침은 늘 바쁜 그의 일정 가운데 불현듯 찾아든 망중한(忙中閑)인양 정적이 흘렀다. 대화가 이어졌다 끊어지는 순간순간, 4월의 봄기운을 잔뜩 머금은 아침의 적막이 빈 공간을 채웠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음악이라면, 봄 아침의 적막은 쉼표였다. 쉼표로 인해 음악이 비로소 음악이 되듯, 그와의 대화는 아침의 고요로 더욱 충일해졌다.
■ 탁월한 합창단 ‘조련사’
윤학원 전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 음악감독(67·중앙대 음대 명예교수). 지난달 말, 그는 35년 동안 헌신해 온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에서 은퇴했다. 1970년 2월 상임지휘자로 입사한지 35년만의 은퇴였다.
윤학원 감독의 이름 앞에는 항상 ‘한국 합창지휘의 대부’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합창단을 이끄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대부’란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화려한 경력을 자랑해온 그였다. 합창지휘자로서는 처음으로 월간 음악상(1973)을 수상했고,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으로 유럽방송연합이 주최한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1978)과 지휘자상(1992), 한국음악협회 최우수지휘자상(1990), 한국합창총연합회 합창대상(1994) 등 수상경력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이런 수상경력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합창단 ‘조련능력’이다. 전문음악단체도 아니고 구호단체 소속의 한 어린이합창단을 맡아 그는 이 어린이합창단을 세계적 수준의 합창단으로 가공해냈다. 원석을 다듬어 보석을 만들 듯, 그는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을 ‘가공’해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지만 1대 1 교수법으로 단원 하나하나에 사랑과 애정을 쏟은 결과다.
카네기홀을 비롯, 해외 유명 연주장에서 공연한 횟수만 300여회, 정기연주회를 비롯한 자선음악회, 국가 주요행사에서의 연주 등 수천회를 넘는 공연횟수는 그가 이 어린이합창단을 어떻게 다듬고 성장시켜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물이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또다른 닉네임, ‘소리의 마술사’란 호칭은 결코 허투로 붙은 장식이 아닌 것이다.
■ 교회음악을 향한 열정
그렇게 갈고 닦아온 합창단 감독직을 그는 훌훌 털고 일어섰다. 제자가 그의 뒤를 이어 합창단을 이끌게 되었지만, 35년이란 긴 세월이 만든 소회(所懷)가 깊지 않을 수 없다.
“섭섭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절감합니다. 하나님은 미약한 종을 세워 도구로 쓰시기 위해 여러모로 보살피며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의 말에서도 나타나지만, 실제로 그의 음악 이력은 믿음의 이력과 촘촘하게 겹쳐져 있다. 지난 71년부터 영락교회 수석지휘자로, 시온찬양대를 이끌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찬양대 가운데 하나로 키워냈고, 국내 순회연주를 하며 교회합창음악 활성화를 위해 그는 큰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는 르네상스에서 현대음악, 뮤지컬에서 한국 민요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영역을 합창단을 통해 소화해냈고, 또 합창이란 장르에 안무를 도입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움직이는 합창단이란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시도 뒤에는 “예술은 창조이고 응용”이라는 그의 예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술관의 뿌리는 역시 신앙이다.
“제 음악의 기초는 역시 교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가 음악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교회 찬양대를 오래 이끌어오기도 했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음악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 신앙의 선율 마지막까지
긴 시간,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을 이끌어오면서 웃지못할 에피소드들도 많이 겪었다. 그 중에서도 이 합창단의 이름 때문에 겪었던 소동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그의 회고.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의 원래 이름은 ‘월드비전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이다.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월드비전’(World Vision)을 ‘선명회’(宣明會)로 해석한 결과다.
그런데 이 선명회란 이름 때문에 한 때는 통일교에서 운영하는 음악단체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주로 공연을 하러 갔는데, 관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오해를 한 지역의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광고하고, 티켓불매운동까지 벌였던 것입니다. 웃을수도, 울수도 없는 사건이었지요.”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한 단락을 마감지었지만, 그는 여전히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인천시립합창단을 이끌고 미국 4개 도시와 캐나다를 순회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고, 현재 자신의 서울코러스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회 지휘자들을 위한 지휘자 아카데미를 통해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또 이곳저곳 강연을 위한 일정도 빽빽하게 그의 수첩을 채우고 있다.
그의 삶에 음악은 신앙과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선율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기도는 음악을 타고 흐르고, 음악으로 채워진 그의 기도는 그의 지휘봉을 타고 흘러나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운다. 그의 ‘아름다운 기도’는 그가 지휘봉을 놓는 그 순간까지 쉼없이 이어질 것이다.
(사진설명: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 지휘봉을 제자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윤학원 음악감독. 그는 지난 35년간 어린이합창단 사역을 마감하며 교회 음악의 미래를 위한 또다른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k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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