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시대 감상법...세부류로 통전적 이해 바람직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총체적인 중세유럽의 부패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삶을 누리고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다. 총체적인 종교개혁의 면모는 다음 몇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물론 개혁자들의 성향에 따라 특색을 나타낸다.


종교개혁의 전체적인 그림은 세장의 그림, 곧 세 부류로 볼 수 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통해 중세 교권주의와 잘못된 신본주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경향들이 고전연구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유럽의 대학과 교수들 그리고 의식 있는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마틴 루터였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잘못된 구원관과 예전들에 집중됐다. 이 전통을 그대로 승계한 사람은 멜랑톤이었다. 그리고 마틴 루터와 같은 맥락에서 교회개혁을 주장한 사람이 취리히의 츠빙글리였고, 제네바의 존 칼빈이었다. 이들이 첫째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중도온건파라 불릴 정도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극단적인 개혁방법도 지양했다.


이런 중도온건파의 개혁에 반대한 양 극단의 논리를 편 종교개혁자들이 또 있었다. 이 가운데 한 부류는 농민전쟁을 주도했던 토마스 뮌쩌이며 다른 한 부류는 재세례파였다. 뮌쩌는 무력을 이용, 착취 당하는 가난한 농민들을 위하여 투쟁했다. 그는 혁명론에 근거한 사회개혁을 진정한 종교개혁의 과제로 이해했다. 뮌쩌는 12개 조항을 만들어 루터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루터 자신도 이에 동의한 적이 있다. 12개 조항을 분석해 보면 결코 독선적이거나 무례한 요구는 아니다. 가령 교구 목사들을 자신들이 선택하도록 해달라는 것, 목사들은 반드시 교회를 지켜달라는 것,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게 해달라는 것, 연못에 낚시를 허락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대부분 그들의 삶과 생계유지에 직접 관계가 있는 것들이었다.


이에 반해 재세례파들은 무저항 비폭력에 의지해 원시 교회로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는 유아들의 세례를 거부하고 역사적인 교회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부패한 세상과는 단절하고 극단적인 분리주의 노선을 걸었던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이런 양극단의 노선을 택하지 않았다. 개혁의 중심과제는 여전히 교회의 개혁이란 것이 그들 주장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이 결코 사회의 개혁이나 삶의 개혁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아니었다. 루터는 당시의 상업행위나 잘못된 부의 착취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비록 농민들의 무력사용에 반대했으나 기득권자들의 억압은 비난했다. 이점에서는 칼빈도 동일했다. 칼빈은 민중을 억압하는 고리대금에 대해 강한 질타를 했고 자신이 제네바시 자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건설하기 위해 사회 전반적인 개혁차원에서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같이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 이 다양성은 독립적인 특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또한 종교개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객관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전체를 보는 통전적 조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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