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삶으로부터

잘못된 구원의 교리에 대한 가르침과 타락한 성직자들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교인들은 새로운 신앙의 돌파구를 희구하고 있었다. 이때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만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며 종교개혁의 문을 두드렸다. 오도된 구원의 교리만큼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었던 것은 성직자들의 부도덕한 행위였다. 이것은 구조적인 악재로 교회에 등장했다.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제네바시 개혁의 지도자 존 칼빈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삶이 동반되지 않는 입술만의 개혁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칼빈은 권력을 지양하였다. 청빈한 경제적인 삶을 누렸고, 가정적으로 따뜻한 남편이었고, 동료들과의 친목을 도모했으며, 불의에 항거했다. 그는 또 경건한 신앙을 가졌으며 말씀의 묵상자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할 때 과부인과 결혼했다. 불행히도 그의 아내는 일찍 죽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생전에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표현했다. 『천사가 자신들의 사랑을 질투하여 아내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제일 큰 교회의 책임자로 있었고 시 당국에서 사례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돈이 부족하여 시에서 가불할 정도였다. 그는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왔고 특히 프랑스에서 피난 온 개신교도들을 돌보는 데 사용했다. 그만큼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목회자로서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제네바시의 군 사령관 위치에 있는 페린(Perrin)이 비 개혁적인 행위들을 일삼고 있을 때 그와 대항하여 교회를 말씀대로 개혁하기 위해 저항했다. 그가 일차 제네바의 목회에서 쫓겨간 이유도 이 사건과 연루돼 있었다. 그는 제네바 교구의 동료 목사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목회를 의논하는 등 친교를 나누었다. 그는 주변의 동료들이 시 당국에서 가불을 하지 말고 차라리 월급을 올려달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자 도리어 시 당국에가서 자신의 월급을 감하여 동료들의 월급과 평준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철천지 원수인 로마교회의 추기경 사돌렛이 제네바를 지나며 칼빈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사돌렛은 너무나 초라한 칼빈의 집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칼빈의 사환이 대문에 와서 사돌렛을 맞이했을때 사돌렛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환을 보고 자신을 소개 하면서 칼빈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이때 사환이 사돌렛에게 자신이 칼빈이라고 말했다 한다. 교황 파이어스 4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칼빈에게 가장 무서운 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돈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고.


그렇다. 개혁은 소리지르는 강단에서가 아니라 목회자들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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