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9월 1일 한복, 양복을 차려입은 목사와 장로들이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 모였다.


전년도 독노회장 리눌셔(李訥瑞, W. D. Reynolds) 목사는 히브리서 12장을 읽고 「장자(長子)의 회(會)」라는 제목으로 강도를 했다. 그렇다. 「예수교장로회조선총회」 제1회 개회 설교의 제목은 「장자의 회」였다. 그날의 모임이 장차 「코레아」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이 외국 선교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한복 차림을 한 목사와 장로들의 감회는 서양 선교사 리 목사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스스로 교회를 치리하길 원했던 대한 장로교회는 이날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조직적 면모를 갖추었다(주1). 그러나, 그 사이 국권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1년전에는 「105인사건」으로 서북지방 기독교인들이 대거 검거되기도 했다.


그날 오후 2시 30분 속계된 총회에서 김석창 목사(북평안노회)는 로마서 8장을 읽고 「나는 괴롭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김 목사의 설교 제목과 설교 본문에서 그곳 총회 현장에 앉아 있던 대한 장로·목사 들의 심경을 짐작해본다(주2).


그날 읽은 로마서 8장은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소망」을 고백하고 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무엇이 얼마나 괴롭기에, 뜻깊은 총회 앞에서 그는 「괴롭다」고 했을까? 국권상실의 아픔 더는 상상할 수 없다. 국권회복의 소망 더는 짐작할 수 없다.


총회의 명칭에서도 국권상실의 아픈 상처는 엿보인다. 총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독노회의 1907년 정식 출범 명칭은 분명 「대한예수교장로회로회」였다. 당시 노회 회의록의 표지에는 「구주강생일천구백칠년, 대한융희일년 대한예수교장로회로회」라고 큼직하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910년 9월 제4회 노회 회의록부터 아무 이유없이 그 명칭이 「예수교장로회조선로회」로 바뀌었으며, 그날 첫총회의 명칭도 「예수교장로회조선총회」였다. 마땅히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였어야 했지만, 대한은 더이상 「대한」을 쓰지 못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렇게 출범했다.




9월 2일 상오 9시 평양서문밖신학교




·서기가 회원의 천서(薦書)를 검사하고 호명한 결과, 경기, 전라, 경상, 함경, 남평안, 북평안, 황해 7노회 121명의 총대가 참석했다(목사 96명, 장로 125명. 목사 가운데 44명은 「외국 목사」였다).


·만국장로회연합회총회, 미국남장로회총회, 미국북장로회총회, 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 조직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왔으며, 회중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초대 회장에 원두우, 부회장에 길선주, 서기에 한석진, 부서기에 김필수 씨가 선출됐다.




9월 2일 하오 2시




·길선주 목사가 「총회가 갈 때에 고퇴(叩퇴)도 가시니 총회를 대신하여 고퇴를 제조하고 편하설씨로 그 위원을 택하기」로 동의하여 가결됐다.




9월 2일 하오 7시 30분 장대현예배당




·이기풍, 김필수씨가 제주 전도형편을 설명했다.




9월 3일'회록에는 2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3일을 맞음' 상오 9시.




·국장요배식(國葬遙拜式) 절차를 확정했다.


·홍승안씨가 총회 인장(印章) 마련 및 위원선정정을 동의하여 가결됐다.




9월 3일 하오 2시




·7노회 보고가 있었다.




9월 4일 상오 9시




·전도국이 제주교회를 보고했다. 『금년 세례인 17인, 세례인도합 58인, 금년아해(유아)세례 2인, 아해세례도합 5인, 금년 학습인 35인, 학습도합 57인, 금년 새로 다니는 사람 200여인, 교인도합 410인, 조사 1인, 영수 1인, 집사 2인, 예배당 3, 기도회처소 5, 학교 1, 남학도 8, 여학도 4, 교사 1, 연보도합 225원 31전 7리, 사경회 1차 80인 성경공부, 매일 사사로이 성경보는 이 20인가량, 주일아침성경공부하는 이 220인, 사기도 하는 이 8, 부흥회기도 1차, 특별회집기도 2차, 교인중에 권능을 받아 병고치는 자 많고, 전도인이 전도하매 문이 크게 열였사오며, 매주일 모이는 남인 2백여인, 매주일 모이는 여인 200여인, 매 삼일 예배에 모이는 이 150여인, 직분들 화합하고 교인들 신령하고 열심있음...』


·총회 산하 각 교회의 소유에 속한 토지 가옥은 법률에 의지하여 관청허가를 받아 사단(社團)을 조직하기로 가결했다.




9월 4일 하오 2시




·고퇴위원이 『7교회를 응(應)하여 일곱나무와 삼위를 응하여 세띠(三帶)를 띄고 십자가 위에 반석같은 교회를 생각하여 견고한 나무로 제조』한 고퇴를 채용하기로 동의 가결했다.


·인장 채용도 동의가결했다.




9월 4일 하오 8시 여성경학원




·2회 총회 처소를 경성으로 정하였다. 미국뉴옥전도총회와 중화관동교회에서 편지로 문안했다.


·회원 일동이 남평안노회에 「접빈에 관대함」을 치하했다.


·마포삼열씨의 기도로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폐회.




(주1)장로교는 당회와 노회와 총회라는 3단계의 조직으로 갖추고 있다. 햇수의 오차를 감안하면, 1900년경부터 당회가 구성된 조직교회가 여럿 생겼다. 당연히 한국 교회는 스스로 치리하길 원했으며, 그래서 1901년에는 「장로공의회」에 한국 장로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외국(미국, 캐나다,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사공의회」(Council of Missions in Korea)는 1907년까지 「아직 한국 목사를 장립하지 못함으로」 노회 조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1907년 6월 2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학사」 7명을 배출(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양전백)하여 목사장립이 가능해짐에 따라, 9월 17일 오전 9시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마포삼열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 독노회 조직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날 한국 최초의 목사 7명이 장립된다. 1911년 제5회 독노회는 「내년에는 총회로 모일 것」을 가결하고회, 독노회(와 7대리회) 조직을 일곱 노회(북평안, 남평안, 황해, 경기, 전라, 경상, 함경)로 분립개편할 것을 가결하여, 총회를 준비한다.





(주2) 물론 김석창 목사의 그날 설교는 남아있지 않다. 지금 우리로서는 단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총독부와 유착」 등의 표현으로 그 모든 것이 설명될 수는 없다. 물론 주장하듯, 외국 선교사로부터 완전히 독힙하지 못하고, 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곧 총회차원에서) 저항을 한 것도 아니며, 「국장요배」를 가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인격적」 총회의 역사로 그 총회에 참석했던 총대들 개개인의 「인격」을 환원할 수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몰역사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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