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인류의 문명이 발달한 결과로 생긴 최초의 의사소통의 형태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의사 전달 수단이란 문자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로 구두로 서로의 의견을 사신들을 통해 전달하였다. 이것은 유명한 구전의 전승이었다. 구약의 족장들 시대에는 구전을 제외하고는 의사소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아니한다. 구약의 야곱과 에서간의 의사소통과 발락과 발람과의 의사소통을 보면 구전을 통해 전달되었지 기록된 서간문은 없었다. 구약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편지형태로 메세지를 전달한 기록은 다윗이 우리아에 의해 요압에게 보내진 서신이었다.(삼상11:4)




신약은 문자활용의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성경의 기록과 제자들의 행적과 신앙의 고백들이 문자로 기록되었다. 그 중 대부분은 편지 형태로 전수되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 신약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간복음도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을 보고하는 서간문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편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아내어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도구였다.




이것은 초대교회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그들의 신학을 저서로 통해 전승하기도 했지만 서신을 통해서도 많이 전달하였다. 3세기의 키프리안은 81통의 편지를 통해 기독교교리의 정통성을 세우고 초대 기독교의 복음을 바로 전승하는데 기여했다. 로마의 제롬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아프리카에 있는 어거스틴에게 편지하여 도움을 청했다. 이로 인해 어거스틴을 논쟁에 끌여드리는데 성공하였고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와의 논쟁을 시작하여 정통기독교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아마 교부들 가운데 가장 많이 편지를 쓴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방대한 서간문을 통해 기독교 세계의 역사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어거스틴의 편지는 각 지역의 감독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에게 보내졌으며 잘못된 기독교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논박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도나투스와의 논쟁이야기이다. 어거스틴의 편지만 연구해도 학위논문이 나올 정도로 그는 편지를 통해 기독교진리를 사수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외에 크리소스톰과 중세의 휼륭한 교황들의 투쟁이야기도 그들의 편지속에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신학적으로 가장 많이 받은 신학자중의 한 사람인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도 엄청난 분량의 방대한 서간문을 남겼다. 그는 그의 동료 개혁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에게도 서신을 통해 신학적으로 논쟁과 대화를 교류하였다. 예를 들면 카톨릭의 추기경으로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사도<0AA76>토에게 그는 편지를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칼빈은 그 외에 베자, 불링그, 존 낙스, 그리고 프랑스의 국왕과 영국의 왕족들에게도 종교개혁을 위해 도움과 설득의 서신을 보냈다. 편지는 역사를 전환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16세기 개신교의 역사를 전환시킬 수 있었지만 실패했던 편지 사건이 있었다. 그는 루터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루터와의 교제와 화합을 위해 여러번 멜랑톤을 통해 서신을 전달하도록 보냈다. 그러나 루터에게 과잉 충성하던 멜랑톤은 만약에 이 편지를 루터에게 보내면 루터가 화를 낼 것이라고 지래 짐작하여 칼빈의 편지를 루터에게 전달하지 아니했다. 칼빈과 루터는 결국 한번도 대화를 하지 못하고 영원한 오해속에 있었고, 두개의 개신교는 탄생되고 말았다. 교회사속에서 편지는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의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바로 지킨 복음의 전령자로 역할하였고 잘못된 복음의 진리를 제자리로 돌려 세우는데 공헌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 수 많은 성인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서간문은 교회역사의 숨은 이야기와 진면목을 들어내는 흥미있고 진귀한 사료들이다.

심창섭<총신신대원>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