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목요일이면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22년전부터 느껴온 증상이다. 40여년 교단을 지켜오며 눈망울 맑은 아이들을 만날 때 갖는 가슴설레임과 유사하지만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때로는 기대감을 갖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두렵지만 그래도 그는 즐겁고 감사해 한다.


김원삼 장로(65·염산교회·서울여중 국어교사)는 지난 76년부터 생명의전화(원장:박종철) 자원봉사자로 수많은 사람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제는 이성, 자살, 배우자의 부정 등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와 최근 부쩍 늘어난 부당해고에 대한 억울함까지 저마다의 무거운 십자가가 된다.


전화가 연결되면 마음의 길도 열리는 모양이다. 남이 알까 두려운 일,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분노와 원망도 모두 쏟아놓는다. 짧게는 20~30분에서 길게는 2~3시간. 그들이 거침없이 토해놓은 부끄러움과 한의 덩어리를 그는 자신의 것인양 최대한 흡수한다.


『제 역할은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겁니다. 이미 그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있으니까요. 너무나 속상하니까, 그리고 답답하니까 하소연하는 거지요. 간혹 자살이나 살인, 폭력과 같은 잘못된 행동을 선택해 놓고 동의를 요청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물론 쉽게 설득되지는 않지만 그 방향을 약간만 틀어줍니다. 평행선의 한쪽을 조금만 틀어주면 그 끝은 엄청나게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를 이용하는 거지요.』


그는 이미 이야기의 종착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목요일의 만남을 기대하는 한편,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쉽지 않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서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개별면담이 없는 것이 원칙이기에 그 기대가 커지기도 하고, 반대로 두려움이 가중되기도 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저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의논할 사람이 없는 이들입니다. 외롭다는 거지요. 외로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끝이 항상 뚜렷한 매듭을 짓는 건 아니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모 기업에서 노조관계로 해고된 회사원과 통화하게 됐는데, 회사 경영진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자신이 계획한 폭력행사에 동의를 요청해온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폭력이 해결책이 아님을 설득하며, 상대방이 살아가야 할 힘겨운 세상살이가 가슴아파 함께 울기를 세 시간. 하지만 상대방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TV 뉴스는 물론 신문과 잡지를 살피며 혹여 어느 구석에라도 그의 기사가 실리는 건 아닐까, 좀더 설득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를 죽이는 건 아닐까, 한번 만나볼 걸 그랬나 하면서요.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김 장로는 오늘도 상담에 앞서 전화 수화기를 잠시 내려놓고 기도한다. 수화기를 올려놓으면서 시작되는 또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간섭하시길, 그리고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의 무거운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할 수록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만둘 수도 없어요. 겉으로는 제가 전화걸어오는 이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제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을 통해 제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길을 안내받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양이예요.』


고희를 바라보는 그를 가슴 설레이게 만드는 이런 만남. 생명의전화 상담원 1기로, 커플(부부) 상담원 1호로 지속해온 이 만남을 그는 혀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까지 지속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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